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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지음

 

멀고도 가까운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엄마 집 마당에서 따온 처치 곤란 살구 더미가 리베카 솔닛의 집에 널브러져 있다. ‘살구가 있던 그 여름’에 피어난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된 솔닛의 이야기가 이 책에 펼쳐진다. 저자에겐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가 있다. 엄마 집에서 따온 처치 곤란한 살구 더미는 자동으로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불편한 ‘무엇’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물러지고 썩어가는 살구는 자동으로 엄마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이젠 치매로 유약해진 엄마에 대한 회상은 온통 흐리다. 딸을 힘들게 하는 치매 걸린 엄마의 이야기를 읽다가 영화 <다가오는 것들>의 이자벨 위페르가 떠올랐다. 시도 때도 없이 딸에게 전화해서 죽을 것만 같다고 하소연하는 아픈 엄마 때문에 곤란해지고 힘들어하는 모습 말이다. 결국, 요양원에서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애물단지 고양이 ‘판도라’와 솔닛의 '살구'가 겹친다. 


자신의 딸을 온전히 받아주지 못하고 시기하던 엄마는 백설 공주에 나오는 왕비다. 프랑켄슈타인과 체 게바라까지. 솔닛은 고독하게 읽었던 이야기들을 고통 속에서 하나둘씩 떠올려 풀어낸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하나씩 이야기를 꺼내 자신의 이야기를 엮는다. 살구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끝없이 또 다른 이야기와 자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상한 자리를 도려내는 살구처럼 자신의 몸에 칼질을 당하던 순간, 의사이자 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겪은 천식과 체가 만난 나병 환자를 떠올린다. 감각을 잃어버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나병 환자의 고통과 감정이입에 대해 고민하고 말한다. 저주에 걸린 동화 속 주인공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역경을 헤쳐나가듯이 자신의 신체적 질병과 엄마의 알츠하이머는 자신이 통제하기 어려운 동화 속의 저주이고 자신이 풀어야 할 역경이다. 현실에서 마주한 고통을 망각하기 위해 얼음과 냉기로 가득한 이야기가 마취제처럼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위기에 순간에 기적처럼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는 결심은 잠시 고통과 거리 두기에 절호의 기회다. 자신이 그림 속으로 사라진 우다오쯔처럼 자신이 쓴 글이 문이 되어 오랫동안 꿈꾸던 극지방 아이슬란드에 갈 티켓을 운 좋게 얻는다.


가장 힘든 시기에 도움이 되지 못한 엄마이지만 동시에 “어떤 생명을 계속 지켜 주기 위해 들이는 그 영웅적인 노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요구하기만 하는 어떤 존재를 돌봐야 하는 그 끝없이 소모적인 일을 이해한 후에는"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던 것." (43쪽)이라고 통합해간다. "어머니의 불행은 내가 끌고 가야 할 썰매라고 생각했다.” (36쪽) 알츠하이머에 걸린 엄마를 보살피다 만난 인연과 이야기가 이 책을 완성하게 된 원동력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지 않은 엄마가 원망스러웠지만, 그 덕분에 고독한 책 읽기와 글을 썼다. 탁월한 이야기꾼이 된 것이다. 자신이 쓴 글이 뗏목이 되어 또 다른 인연을 만나 위로를 얻는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저자가 펼쳐내는 이야기의 협곡 사이사이에서 내 이야기도 하고 싶어 진다."읽기와 쓰기와 고독이 지닌 깊이가 나를 반대편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어지게 했다.(85쪽)" 가끔 은유 배지같이 느껴지는 독일에서 그녀가 고독으로 써낸 책 한 권으로 약한 연대를 경험했다. 내가 글을 쓰는 혹은 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은 소망 때문은 아닐까. 


인생길 고비마다 만나게 될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역경과 시련 속에서 길을 잃어 넘어질 때마다 힘이 되어줄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지독한 고독 속에서 읽고 쓰다 맺게 되는 연대의 힘까지. 누군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다가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이야기도 풀어내면서 훌훌 털고 일어나 굳건히 걸어가게 되길 바란다.  솔닛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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