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내내 내가 사는 동네엔 태풍이 몰아친다. 무서운 비바람이 치다가 가늘어진 빗방울은 창문을 두드린다. 두 녀석과 함께 꼼짝없이 집에 갇혔다. 내 마음에도 태풍이다. 버지니아가 런던으로 가는 플랫폼에서 남편에게 울분을 토한 것처럼 나도 그날 밤 남편에게 울분을 토했다. 이 영화 덕분인가. 삼년만 아이 곁에 있어줄려고 했는데 어느새 십년이라니! 내 존재의 가벼움 때문에 미치겠다. 태풍은 지나가고 또 다시 태양은 떴다.
버지니아가 서서히 물 속에 몸을 맡기는 첫 장면은 울프의 자살을 예감한다. 절대 권력, 소설을 쓰는 작가의 손에서 작품 속 주인공은 죽거나 산다. “댈러 웨이 부인은 자신을 위해 꽃을 산다.” 라고 울프가 쓴 첫 문장 대로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메릴 스트립과 로라(리차드 엄마)가 화면에 분주하게 나온다. 클래리사(메릴 스트립)는 직접 꽃집에 들러 파티를 준비할 꽃을 사고 로라(줄리안 무어)는 자상한 남편이 대신 꽃을 화병에 꽂으며 아침을 준비한다. 만삭의 아내를 위한 배려다. 다 갖은 듯 보이지만 이상하게 슬프고 불안한 로라의 눈빛이 마음에 걸린다. 아이를 두고 죽고 싶은 만큼 괴로운 그 심정이 감히 짐작된다면 오바일까. 감정 이입이 많이 된 캐릭터다. 자신을 찾아 떠난 로라를 쉽게 비난하기 어렵다.
버니지아의 몽롱한 눈빛은 요리사에게 요리를 부탁하든 조카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작품을 쓴다. 머릿속이 온통 쓰고 있는 글이다. 가장 섬뜩하고 선명하게 남는 장면은 울프의 조카가 죽은 새의 장례식을 치루며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눈뜬 새 옆에 누워 주인공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죽은 새의 번득이는 눈빛에서 호텔 방에 누워 죽기로 결심한 로라의 눈빛으로 장면은 바뀐다. 어린 아들, 리차드를 맡기고 호텔에서 죽음을 선택하려는 찰나, 버지니아는 마음을 바꾼다. 죽이지 않기로. 버지니아의 손에 달린 로라의 운명이다. 임신한 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것은 무엇일까. 남편의 생일날 망친 케잌 때문일까. 아니면 다 갖은 것처럼 보이지만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일까. 아이까지 버리고 떠날 수 밖에 없는 엄마이자 한 여자 로라의 슬픔이 화면 내내 떠다닌다.
이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볼 때 그리 행복하지 못해서 그런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 여성의 삶이 슬프고 불행한 장면에 깊이 몰입됐다. 행복해 보이지 않은 세 여인의 슬픔이 현실에 있는 내게 전해졌다. 분명 여성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진대.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감지된다. 아이가 있든 없든, 자상한 남편이 있든 없든. 글을 쓰든 책을 읽는 독자로 살든. 행복엔 정해진 룰이 없어 보인다. 파티를 준비하며 꽃을 사러 꽃집에 들린 이도 케잌을 굽는 엄마일지라도 화려해보이는 타인의 삶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죽을 것 같은 순간에 버텨서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
즐거워야 할 파티를 준비하면서 일어난 많은 일들이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다른 공간 동일한 시간대인 단 하루에 일어난 세 여인의 삶은 어렵다. 런던으로 가는 기차 플랫폼에서 쏟아내는 울프의 말들은 아프다. 아들 리차드의 죽음 앞에서 "It was death. I choose life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엄마는 비극적이다. 오래 전에 죽고 싶었지만 죽지 못하고 대신 아이를 버리고 떠난 로라와 엄마를 그리워하며 자살을 선택한 그의 아들 리차드의 마지막 눈물은 뜨겁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편에게 남긴 유서에 반복적으로 쓰인 “함께한 세월(the hours), 소중한 시간들(the hours)” 이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다. 결국 리차드와 버지니아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로라와 댈러웨이 부인은 남겨졌다. 니콜 키드먼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처럼 실제의 그녀도 가녀리고 신경질적일 것 같다. 니콜 키드먼 뿐 아니라 로라역의 줄리안 무어와 메릴 스트립까지. 세 여인이 펼친 명 연기는 훌륭했다. 앞으로 살아갈 '세월, 소중한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라는 질문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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