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77년 2월 21일에 서울 용산의 어느 병원에서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내 위로 네 명의 언니들은 모두 집에서 태어나던 시절인데 나만 병원에서 태어났다고 들었다. 그때 그 시절엔 출생신고를 하러 간 날짜가 출생 일이 되는 건지 출생신고가 3월 1일로 되면서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0301로 끝난다. 한동안은 아빠가 또 딸이라서 실망하셔서 출생신고를 늦게 하신 건 아닐까. 의심했다. 살면서 주민번호와 실제 생일의 차이가 뭐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독일에 와서 생각할 기회가 생겼다.
이 집에 처음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할머님은 가장 먼저 우리 가족의 생일을 일일이 물으시고 달력에 기재하셨다. 언젠가 역술인 앞에서 내 생일뿐 아니라 가족 생일을 말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걸 남편이 대신했는데 내 생일을 3월 1일로 말씀드렸다. 한국에서 매번 음력으로 지내던 그래서 매년 바뀌는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지만. 남편의 변에 따르면 서류가 굉장히 중요한 독일이니, 나중에라도 문제될지 몰라서 주민등록상의 생일을 알려드렸단다.
할머님은 우리 가족 생일을 부담스러울 만큼 꼬박꼬박 챙기신다. 어제 3월 1일에 할머님은 선물을 들고 오셨다. 이 시점에서 내 생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럽고 가족도 혼란에 빠졌다. 난 매번 음력 생일을 하다가 진짜 생일날도 아닌 서류상 날짜인 3월 1일로 하려니 낯설었다. 생일이 꽤 중요한 독일에서 친구들도 내 생일을 물어볼 때 나도 모르게 3월 1일을 말했다. 음력을 사용하지 않는 독일인에게 음력 생일을 설명하기도 어렵기에. 그래도 내 진짜 생일인 2월 21일을 말했어야 했는데 3월 1일로 말한 건 내 잘못이다. 다시 또 바꾸려면 애 먹겠다.
나와 매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산책하는 친구 피트가가 얼마 전에 내 생일을 묻기에 아무 생각 없이 말해주었다. 내 생일을 챙길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해서. 생일이 다가올 즈음엔 다시 재차 확인하길래, 혹시 선물이라도 들고 집에 올까 부담스러워서 내 생일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누군가 생일을 챙기는 일이 익숙하지 않기에. 그런데 3월 1일 오후 4시에 피트가는 역시나 집으로 찾아왔다. 그것도 남편과 함께. 곱게 포장한 선물을 안겨주면서 독일어로 생일 축하 노래까지 약식으로 불러준다. 나를 꼭 껴안아 주면서. 너에게 행운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했다. 옆에 어색하게 서 있던 남편까지 나를 안아주며 생일 축하를 해주었다. 피트가는 "너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고 네 생일은 중요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 VIP(Very Important Person)가 떠오른다. 그렇지. 어쩌면 나는 내 인생의 VIP였는데 그걸 잊었다. 생일이 없으면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고. 그만큼 생일이 중요한 모양이다.
생일엔 늘 엄마가 떠올라 울적했다. 내 존재의 인식보다는 나를 힘들게 낳고 원하는 아들이 아니어서 실망했을지도 모를 엄마의 마음이 읽혀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갖고 싶은데 갖지 못하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을 테니까. 살면서 자주 엄마가 떠오르지만 생일엔 유독 더 많이 엄마가 생각난다. 다섯 번째 딸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예쁜 이름을 지어준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고, 살면 살수록 낳아주셔서 감사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나이를 지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엄마가 살았던 나이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는 게 가끔은 놀랍고 감사하다. 그만큼 난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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