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 몇 일 전 아이는 담임 선생님이 주신거라면서 브레멘 VolkshochSchule(VHS)에서 출력한 독일어 수업 스케줄표를 가져왔어요. 제가 다닐 수 있는 가능한 시간대의 수업엔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서요. 4학년 마지막 그릴 파티 때 선생님과 잠깐 이야기하면서 독일어 때문에 힘들다고 했는데 그걸 기억하셨다가 반 아이 엄마인 제게 도움을 주신 거죠. 집에서 가까운 VSH는 도통 자리가 나지 않고 지금은 쇼팽과 개인 수업을 한다는 것까지 아시거든요. VSH는 시민대학 정도될까요. 시간을 투자하는 게 아직도 아까운 마음에 미루고 미뤘던 것을 선생님 덕분에 9월부터 다기기로 등록을 마쳤어요.
사소한 일 같지만 이런 작은 관심이 참 감사해서 두고두고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전형적인 독일인이에요. 어떤 모습에서 전형적이라는 말을 떠올렸는지 모르겠지만, 본인도 그리 말씀하셨어요.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면담 시간에도 늘 영어가 유창한 제자를 대동해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은 독일식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좀 더 정확한 소통을 위해 통역을 부탁했노라고. 선생님을 보면 독일어가 유독 잘 어울려요.
아이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염려해서 한국에서부터 메일을 몇 번 주고받았는데 무척 친절한 느낌이었어요. 첫 인상은 큰 눈과 도드라진 광대뼈 그리고 적당히 짧은 머리와 당당한 걸음걸이에 금방 압도되었고요. 2년간 직접 경험한 아이에게 물어보니까 화 내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고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지만 선생님이 뭐라 말씀하시면 반 아이들이 말을 잘 듣는다며 놀라워했어요. 물론 부담임에게는 없는 점수(Note)를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이시라 그럴지도 모르지만요.
지난 2년을 돌아보니 선생님은 담임 이상의 역할을 우리에게 해주셨어요. 무엇보다 내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었고, 영어가 가능하고 따뜻한 아이 킴에게 새로 온 아이(우리아이가 영어가 능통한 것도 아니었지만)를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특별히 부탁하셨다, 라는 걸 1년 후(3학년이 끝날 무렵)에 알게 되었고요. 지금까지 단짝 친구로 지내고 학교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죠.
엄마인 나까지 처음부터 챙겨주셨는데 한국에 관심이 많은 한나를 소개해주었어요. 아비투어(한국의 수능)를 통과했지만 특별히 하고 싶은 공부가 없어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서점에서 일하는 친구요. 지금은 함부르크의 어느 호텔에서 일해요. 공부보다는 돈을 벌어 여행을 많이 하고 싶은데 그 중 한국도 포함되고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엑소를 좋아하고 한국 예능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아는 친구에요. 드라마에서 왜 연인에게 오빠라고 부르는지 식당에선 여자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쓰는지 궁금해했고요. 한국어도 독학으로 공부 중이었는데 더듬더듬 읽을 정도였죠.
처음 독일에서 6개월간 일주일에 한 두 번씩 한나를 만나는 일은 큰 활력이 되었어요. 독일어도 배우고 한국어를 가르칠 계획이었지만, 영어를 하는 독일인과는 아무래도 언어를 배우는 일은 힘들어요. 우린 한 두 시간씩 그저 영어로 떠들다가 헤어지곤 했어요.
캥거루 수학 경시 대회라는 신청서가 왔을 때 독일어 해석이 귀찮아서 신청하지 않았을 때도 선생님은 영어로 쓴 쪽지를 보내주셨어요. 수학을 유독 좋아하는 용호가 이 대회에 나가면 좋아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죠. 뒤늦게 신청서를 보냈고 대회에서 학교에서뿐 아니라 니더작센주 전체에서 1등을 하기도 했어요. 그 당시 독일어가 서툰 아이를 위해 영어 시험지와 독일어 시험지 두 개와 보조 선생님의 도움으로 시험을 봤고요.
그뿐 아니라 수학시간에 가장 먼저 끝내는 아이를 위해 사비를 들여 교재를 구매해주신 적도 있어요. 3학년 때는 좀 더 난이도 있는 교재를 구매해주셔서 비용만 우리가 지불했고요. 모든 선생님이 이렇게 친절하고 세심하진 않을 텐데 우리가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맡은 아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일도 자신이 할 일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최선을 다했어요. 선생으로서의 사명감도 느껴졌고요. 겉으로 보기엔 따뜻한 느낌은 없지만 중요한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저력이 느껴진달까요. 어쩌면 이게 독일인의 중요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네요.
'낯선곳보통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런 뻘짓은 처음이라서요 (0) | 2018.08.14 |
---|---|
독일 생존 수영(Rettungsschwimmen) (0) | 2018.07.23 |
당신 딸에게 따뜻한 신발이 필요할 것 같아요. (0) | 2018.07.14 |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0) | 2018.07.12 |
유럽 여행보다 그리운 고향 (0) | 2018.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