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두 사람이 떠올랐다. 실은 조손 가정에서 자란 한때를 떠올리기 싫어서 미루고 미뤘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읽으며 자동으로 7년간 내 풍경이 되어 주었던 시골 생활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아빠의 서울 집 주소보다 더 선명하게 새겨진 ‘죽청리 227번지’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은 마룻바닥에 휙 던져놓고 온종일 놀던 동네. 해가 지고 뜨는 것에 의지해 살던 산골짜기의 불빛은 오로지 집마다 켜둔 둥근 다마가 전부. 친구네서 놀다가 밥 먹어라, 부르는 할머니 소리에 집으로 가는 길 위의 빈집이 무서워 매번 부리나케 달렸던 것까지.
열두 명의 자식을 키우고 맞게 된 장남의 막내딸이 반가울 리 없는 나이 든 모습. 마을 입구 효자 비석에 아들 손자 이름이 줄줄이 새겨 자랑이 된 할아버지에 비교해 그때 당시 아흔이 되신 노모를 모시던 할머니에게 난 일거리가 늘어난 불쌍한 손녀일 뿐이다. 처를 여윈 장남의 딸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맡겨진 나. 그들의 입장에선 최선을 다했다고 이해되는 세월의 힘까지. 나를 돌보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맡으셨는지. 그녀(달님, 저자)가 기억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저 부러웠다. 온 힘을 다해 애지중지 손녀를 대하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 걸 알기에.
손녀가 자식보다 더 예쁜 이유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에 그렇다고 알고 있다. 잠깐 와서 손님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자식을 다 키운 마당에 그것도 신체적인 나이를 무시하기 힘들 때 책임질 아이가 생긴다는 건 어떤 일일까. 고작 네 살 터울로 둘을 키우면서도 나이를 체감한다. 서른에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땐 조금 과장해서 날아다녔다. 의욕도 넘쳤고. 둘째 아이를 낳고는 여러 면에서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고작 서른 중반에 만난 두 번째 육아도 확실히 달랐다. 내 자식의 아이라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 것 같다.
누군가를 애정하면 동작 하나 말 한마디 모두 깊게 각인된다더니만 그녀에게 ‘나의 두 사람’이 그렇다. 보통은 부모에게 자식이 그런 존재일 터, 그녀가 기록한 어쩌면 사소하지만 그렇게 사소하다고 할 수 없는 순간들을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일은 한 사람의 세계를 책임지는 엄청난 일이구나 생각해본다. 애틋하게 기록하며 기억하는 것만큼 '나의 두 사람'에게 귀한 선물도 없지 않을까.
할머니가 거칠게 싸준 소풍 도시락 그리고 운동회에 참석한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 엄마가 아닌 할머니여서 창피했었는지 어땠는지 조차 이젠 기억나지 않는다. 자랑스럽진 않다는 흐릿한 기억이 내 몸 어딘가에 남았다. 할머니는 대부분 손녀를 엄청 예뻐하던데 왜 우리 할머니는 저렇게 무뚝뚝하실까. 나를 대하는 할머니를 손길과 표정에서 자주 피로함을 느꼈다. 내 존재의 가벼움을 자주 체감했다. 엄마가 없다는 건 아빠의 부모일지라도 여러 곳에서 천덕꾸러기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거. 내가 자식을 키워보니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알 것도 같다. 직감적으로 읽히던 애처로운 타인의 눈빛도.
늘 엄마가 있는 풍경을 그리며 살았다. 엄마하고 매일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금새 화해하고 밥을 같이 먹고 손 잡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실현되기 어려운 꿈이다. 가장 기쁜 일이 있을 때 온 힘으로 기뻐해주고 아픈 일이 있을 때 온 힘으로 위로해 줄 사람을 갖는다는 건 더 그렇다. 대신 엄마가 되어 그 꿈을 실현 중이다.
“네가 더 자라면 알게 되겠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가족의 풍경을 가지고 산다고. 너 역시 조금 다를 뿐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고” 엄마가 없는 풍경이 자주 쓸쓸하지만 조금은 다른 가족 풍경을 가지고 사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내게 늘 했던 말이다. "많은 것을 무릅쓰고 온 한 사람이 항상 네 옆에 있었다는 걸잊지 말라고" 어렵게 졸업식에 와 준 할머니와 짜장면을 먹던 날 저자가 스스로에게 했던 말처럼 잊지 말아야할 마음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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