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에 걸려 아들도 못 알아보는 엄마, 김혜자에게 안내상은 묻는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어요?” 느리게 대답한다.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동네에서 다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안치고 그때 한참 아장아장 걷는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하늘이 온통 오렌지빛으로 물드는 저녁, 젊은 날 아들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와 퇴근한 남편을 만나는 장면이다. 팔 벌린 아빠에게 달려가는 아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아내 그리고 아이를 안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모습, 과거를 회상하다 현재로 돌아와 김혜자는 담담하게 중얼거린다. "그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감동적인 부분이다.
정말 그렇다. 행복한 순간은 대단한 날이 아니고 아주 평범한 날 사소한 순간이다. 오랜만에 해가 쨍하게 비춘 오후에 얘들하고 산책하며 호탕하게 웃을 때다. 개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보다 훨씬 어렵게 이젠 머리 큰 남매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꼽아보니 한 달에 한두 번이나 될까 말 까다. 오누이가 싸우지 않고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평화로운 순간이 간혹 있다. 그때는 대부분 놀이를 통한 웃음이 번질 때다. 이걸 쓰다가 암스테르담에서 숙소를 찾다가 장난기가 발동된 때가 떠올랐다. 하필이면 고흐 박물관에서 4시간 이상 그림을 본 날이라 다리가 무진장 아팠다. 신발도 불편했는데 하필이면 그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헤맸다. 남편이 누군가에게 길을 물을 때 잠깐 보도블록에 앉아 쉬면서 생각했다. 에휴, 우리도 차가 있었다면 얼마나 편할까? 아직도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길래, 아픈 다리 때문에 짜증이 확 났지만 계속 신세 한탄을 할 것이냐. 이 순간 언젠가 추억이 되게 즐길 것인가. 라는 생각이 스쳤다.
남편이랑 딸이 도로 반대편에서 먼저 걸었고 아들과 나는 뒤처져서 겨우 따라갔다. 도로가 한 팔차선은 되어서 점점 간격이 벌어졌다. 아들이 먼저 아빠를 따라잡으려고 길을 건넌다. 신호등도 없는 곳에서. “거기서!” 소리를 빽 지르며 따라 건넌다. 남편과 딸은 우리가 건너는 걸 못 본 것 같길래 감쪽같이 숨었다. 해질 무렵이라 검은색 옷을 입어서 아들과 나는 벽에 붙으면 잘 분간하기 어렵다. 차 뒤에 숨어가면서 뒤따랐다. 어느 순간 우리를 찾는 모습이 저 멀리서 보인다. 전화를 하는 것도 같고. 최대한 숨어서 못 찾게 했다. 남편과 딸은 계속 반대편을 찾는다. 그때 바짝 뒤쫓아서 깜짝 놀래주었더니만 그제서야 안도하는 모습이라니! 우리가 납치된 줄 알았다나. 짧은 순간에 남편의 당황하는 모습도 웃기다. 덕분에 발 아픈 것도 잊고 숙소까지 한 걸음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에서 유명하다는 두꺼운 감자튀김을 먹으려고 줄을 길게 서고 고깔 종이에 담긴 소스 범벅이 된 걸 이상하게 맛있다며 경쟁적으로 먹을 때, 끝말잇기 대신 아무 첫 글자를 던지고 그걸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는 게임에서 ‘설’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는데 ‘설’사를 말하는 엄마 때문에 모두 대박이라며 웃어 넘어갈 때다. 웃음을 유발하는 놀이를 할 때 의외로 상황을 웃기게 만든다. 사소한 일도 신기하게 각인시켜서 그 순간이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눈이 부신 날은 어쩌면 그렇게 평범한 날에 호탕하게 웃거나 잔잔하게 미소짓는 때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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