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축구할 때 입을 티셔츠 하나 샀어.” “난 필요 없는데 뭐하러 그런데 돈을 써요?” “(갑자기 뻘쭘 해져서)어, 엄청 싸서.” “얼만 대요?” “원래는 16유로인데 할인해서 5유로. 완전 싸지. 운동할 때 땀도 흡수되고 좋을 거 같아서.” 남편이 오랜만에 월급을 받은 8월 말, 오누이만 남겨 두고 쇼핑하러 나간 날 아들하고 통화한 내용이다. 돈 쓰는 맛의 사치를 좀 부렸다. 그래 봤자, 아울렛 매장에서 얘들 저렴한 티셔츠 몇 벌이랑 출근하는 남편 와이셔츠 세 장 그리고 내 신발 하나를 골랐다. 솔직히 안 사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들이다. 쇼핑할 경제적 여유도 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물건 고르는 일이 나에겐 엄청난 스트레스라서 더 그렇다. 책을 고르는 건 쉬운데 그 외의 것들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큰아이가 '토고'라고 새로 사귄 친구가 집에 놀러 온 날이다. 여름 방학 전에 그 집에 초대받아서 점심도 먹고 하루 놀고 왔길래 우리 집에도 초대해서 점심도 같이 먹고 놀라고 했다. 학교 끝나고 바로 와서 5시간 집에 있었는데 점심 먹고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나갔다 온 시간을 제하면 4시간 이상을 핸드폰 게임만 한다. 친구가 돌아간 다음에 너무 심한 거 아니냐고 좀 다른 것도 하고 밖에서 놀고 그러지 왜 그렇게 게임만 하냐니까. 우리 집엔 플레이 스테이션이 없어서 그렇단다. 그것도 결국 게임기인데 엄마의 질문에 동문서답이다. 친구가 왜 너는 없냐고 묻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난감했다면서. 자긴 필요성을 못 느껴서 안 산 거라고 둘러댔는데 마음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너도 갖고 싶으냐니까 자기도 있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우리 형편에 비싼 게임기를 갖는 게 좀 그렇단다.
아이 입에서 ‘우리 형편’이라는 말이 나오니 기분이 묘했다. 그깟 게임기 하나 때문에 아이 자존심이 상하게 한 건 아닌가 싶어서. 남편하고 전후 사정을 얘기한 후 결론은 우리가 형편이 좋더라도 플레이스테이션(뭔가 싶어서 검색해보니 게임이 계속 사람을 죽인다)은 안 사줄 거라는 거다. 차라리 핸드폰을 사양 좋은 걸로 바꿔주던가 차후엔 데스크탑으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나을 거 같다면서. 어차피 게임을 한다면 작은 화면보다는 넓은 화면에서 하는 게 시력엔 나을 테니까. 게다가 주구장창 게임만 한 이유는 정원에 다른 집처럼 축구 골대도 없으니 축구도 못한단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마음만 있으면 의지만 있으면 축구 골대 없어도 충분히 다른 놀 거리는 넘친다. 더 어릴 적엔 어떻게든 뭘 가지고도 잘 놀더니만 기기 맛에 중독된 이후엔 다른 건 시시한 모양이다.
딸이 여름방학 때 쓴 일기에서 “베를린에서 생선을 먹었는데 90유로나 나왔다고 엄마, 아빠가 계속 이야기했다.” 뭐 이런 대목이 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가난한 부모는 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궁색한 부모로 살고 있다. 물론 기가 죽거나 비참한 건 아니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대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그 과정에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론 점점 나아지겠지. 아니면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며칠 전 남편은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니까 사고 싶은 거 사면서 돈 좀 쓰면서 풀란다. 이건 또 무슨 소리? “내가 돈 쓴다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사람이야?" 남편은 바로 “하긴 그렇지. 그런 사람이었으면 나랑 못 살았겠지.” 푸하하 그건 그렇지. 나란 사람이 물질로 채워지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물론 이런 생각은 계속 든다. 나는 왜 부자였던 적이 없었을까. 왜 계속 가난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는가.
돈은 이정도만 있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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