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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곳보통날

고유한 존재로 불리는 이름

아시아인 이름에 뜻이 있다는 걸 아는 유럽인이 많지 않을 텐데 발마사지 수업에서 두 번째 만난 피트가는 발음하기 어려워 겨우 어렵게 한 자 한자 띄엄띄엄 발음하면서 내 이름을 자기 노트에 써달라며 묻는다. 뜻이 무엇이냐고. 독일에서 뜻을 묻는 사람은 처음인 데다가 독일어로 선비 유, 참 진을 설명하려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든 말해주고 싶어서 나온 말은 "잘 배우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품은 뜻대로 참된 선비라면 잘 배우는 사람이라는 설명이 틀린 말도 아니다. 말하고 보니 난 잘 배우고 싶은 욕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다. 배움에서 기쁨을 느낀다. 새로운 걸 배우는 일은 삶이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도구 중 하나라 믿는다.

 

내가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름, 유진은 그 옛날 형제가 열두 명인 대가족의 장남에게 시집 온 엄마가 딸만 다섯을 낳으면서 다섯 번째 딸에게 지어준 이름이다. 막순이나 후남이라고 짓지 않은 건 행운이다. 내가 늘 했던 말이지만 21세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뿐더러 요즘 애들 이름에서 자주 만나는 세련된 이름이다. 경숙, 현오, 지선, 윤경, 유진. 딸 다섯의 이름인데 그중 제일은 유진이다. 엄마가 그 당시 좋아했던 연예인 이름과 비슷하게 지은 이름이라도.

 

독일 사람에게 유진은 발음하기 꽤 어렵다. 독일인 이름에 Y가 들어가는 경우도 못 봤다. 스펠링을 Yujin이 아니라 eugene으로 바꾸면 eu이 오이로 발음해서 오이진이 된다. 그뿐 아니라 유진이 유신이 된 문서도 자주 본다. 발마사지 수료증에도 유신 Yusin으로 쓰여 다시 발급받았다. 독일어 J발음이 S와 비슷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독일 살다 보니 나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독일은 결혼하면 여자가 남편의 성을 따르니 당연히 나를 남편 성을 붙여서 Frau Lee라고 부르기도. 혹은 Frau Kim. 프라우에 성을 붙이면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니 김나스틱에선 '프라우 김'이다.

 

요즘 난 아들 이름 바꾸기에 골몰이다. 내 아이 '용호'라는 이름은 시댁의 잔재다. '용'자는 이 씨 집안 학렬자. 하필이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새엄마 이름의 중간자와 겹친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내 아이 이름을 시아버님이 지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는 아무 정신이 없었고 남편은 손주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짓는 것도 의미 있겠다 했다. 몇 개 이름 중 고른 것도 아니고 달랑 하나로 낙찰이다. 그땐 왜 단호하게 거부하거나 다른 의견 내는 일을 못했는지 지금도 의아하다. 이름에 동물 호랑이 호자가 들어간 것도 영 싫다.

 

남매가 가운데 이름자가 통일되게 '재'자를 넣어 재원, 재온, 재하, 재언으로 할까. 아니면 외자로 준이라고 할까. 이제야 이름을 바꾸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아이는 그나마 엄마가 원한다면 바꿔도 상관없다면서 시쿤둥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독일 이름으로 바꾸는 건 어떠냐고. 이미 익숙해진 이름을 바꾸게 되면 치러야 할 불편한 일들. 아이 이름 정도는 엄마가 짓고 싶다는 바람을 십이 년이 지나서야 한다니. 학렬자 따위 상관없는 아이 고유의 존재로 불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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