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너무 짧게 잘랐나 보다. 뒷목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온다. 한 번 짧은 커트를 한 이후엔 자꾸 짧게 자른다. 짧은 머리 스타일이 은근 중독이다. 머리 감고 말리는 일이 얼마나 간편한지.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도 짧으니 청소하기도 편한 느낌이다. 독일에서 겨울엔 비니 모자가 필수인데 아직 내 마음에 쏙 드는 모자를 못 찾았다. 새벽마다 딸 혼자 학교 보내기 걱정돼서 매일 아침 학교를 데려다줄 때 잠시 방심했나 보다. 감기가 바로 뒷목을 타고 들어왔다. 주말엔 설사병으로 고생하고 감기 기운이 약하게 있었는데 월요일은 딸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누웠다. 아무 일정 없는 날이라 얼마나 다행인고 하면서. 미니잡으로 발마사지를 알아보고 있는 중인데 그거라도 되면 이젠 온전한 자유시간은 없어질지도 모른다. 오늘이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한가한 날이다.
그러던 참에 힘 불끈 나는 소식이 생겼다. 크리스마스에 암스테르담으로 가족 여행을 갈 예정인데 이번엔 꼭 가고 싶은 콘서트홀이 있다. 그곳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꼭 듣고 싶은데 신용카드가 없어서 예매를 못했다. 독일에선 신용카드를 만들지 않았고 한국 카드는 인증 절차가 까다로워서 포기. 도통 방법이 없었는데 남편이 해결했다. 친한 직장 동료에게 이야기했더니만 자기가 대신 티켓을 카드로 끊어주겠다고. 현금을 주고. 이렇게 고마울 수가. 드디어 암스테르담 콘서트 게 바흐(Concertgebouw)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안되면 당일에 가서 암표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내가 너무 실망하는 걸 보고 남편이 어떻게든 티켓을 구해준 게 고맙다. 12월 26일 오후 2시, 좌석도 몇 개 남지 않은 걸. 점심시간에 둘이 매일 산책을 하는데 그 시간을 포기하고 예매해주었다. 고마워라. 아픈 몸이 나아지는 것 같다. 날 생각해주는 남편님이 고마워서. 힘을 내야지. 마음까지 무너지지 않게. 생강차를 열심히 마시고. 머리칼은 잘려서 가벼운데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리면서 미역을 물에 담그고 쌀을 씻어 안친다. 건강한 밥을 먹고 힘내야지 싶어서.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점심 준비하는데 아들이 띵동 벨을 누른다. 아이 오는 시간은 왜 그렇게 빠른지. 대박인 소식이 있다면서. "그래? 뭔데?" "아들아. 혹시 시험 성적 나왔어?" 그동안 무슨 시험을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만. 글쎄 독일어 시험에서 2등급을 받았단다. 그 어려운 독일어를. 5학년 때부터 독일어 2등급이 목표였는데 6학년 1학기를 마치면서 달성했다. 그것도 2점 부족으로 아쉬운 2등급. 2점만 있었어도 1등급인데. 아무튼 잘했다. 엄마 감기가 싹 달아나는 것 같다면서 꽉 안아주었다. 장한 우리 아들. 독일어 선생님도 안타까워하셨던 부분인데 성적이 오른 걸 딱 알아보시고 "Weiter so, Yongho!!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 용호야!!"라고 써준 손글씨에서 기쁨이 보여서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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