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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곳보통날

당신 딸에게 따뜻한 신발이 필요할 것 같아요.

(독일에 도착한 45개 박스 중 15개가 책, 총비용은 삼 백 만원)

시월 초, 딸의 담임선생님이 내게 당신의 딸에게 따뜻한 신발이 필요할 것 같아요, 라고 말했다. 마침 이삿짐이 도착하기로 된 날이라 얼마나 다행이던지. 독일의 시월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숲에 자주 가는 아이에게 여름 샌들보다는 운동화가 필요하다. 아이 발이 얼마나 추워 보였으면 저런 말을 다 하나 싶어서 얼굴이 잠시 화끈거렸다. 한국에서 독일까지 오는 데 근 네 달(6월 14일에 짐을 싸서 10월 6일에 도착)이나 걸린 이삿짐엔 아이가 최소 2년은 신을 수 있는 계절별 신발이 한 열 켤레는 있었다 

보통은 한국에서 배로 이삿짐을 보내면 한 달정도 걸린다고 해서 우리가 독일에 도착하고 난 이후 열흘 상간으로 도착할 수 있도록 보냈다. 간혹  지연될 것을 염려하고 한달 안에 도착하기 어렵다니 넉넉잡아 두 달은 걸릴 거라는 해외 이삿짐 업체의 말대로 이삿짐은 한국에서 우리가 독일에 도착하기 한 달 반 전에 보냈다. 해외 이사도 처음인 데다가 불안한 마음은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게 만들었다. 결론은 아는 사람 소개를 너무 믿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우리가 독일에 도착하고 나서도 두 달이 지나서야 짐을 받았다는 거다. 결국 4개월이 걸린 셈이다. 그 사이 여름이라 옷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우리가 올 때 필요한 물품은 챙겼기에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9월의 독일은 생각보다 추웠다. 비가 자주 내렸고 가을이 시작되는 문턱이다. 6월 초에 한국에서 보낸 짐을 10월 초에 받았으니 그간 우리가 한 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삿짐 업체의 계속 되는 거짓말과 전화 회피 등 상식에 어긋나는 반응엔 한국에 남은 일말의 정을 떨어지게 했다.

살림의 간소화로 가구나 전자 제품 등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고 살려고 애썼다. 독일행을 준비하면서는 특히나 더 뭔가를 사들이는 일들은 자제했다. 짐을 정리하고 쌀 즈음엔 그래도 숨은 짐들이 많았기에 처리하고 정리하는 일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국내 이사가 아닌, 해외 이사는 늘어나는 만큼 돈이라고 생각하면 꼭 필요한 것을 가리고 그렇지 않은 것을 빼는 작업은 두 번 다시 못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다.

우리가 구한 집은 가구와 가전이 모두 갖춰진 상태라 대부분 필요 없었다.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쇼파뿐 아니라 감자 깍기 호두 깍기 와인 잔 등 없는 게 거의 없을 정도로 세팅되어 있었다. 짐을 꼼꼼하게 잘 싼 편인데, 제일 요긴하게 쓰는 전자 제품은 전기 밥솥 정도다. 독일 압력 밥솥이 워낙 유명하니 굳이 전기 밥솥도 필요 없다. 가전은 청소기와 밥솥만 챙겼고 그 외의 것들은 가져오지 않았다.

아이 살림살이(책, 장난감, 속옷, 신발)에 신경을 많이 썼다. 환경이 바뀔 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선 자신이 가지고 놀던 아이가 아끼고 좋아하는 것은 최대한 그대로 챙겼다. 바닥 난방이 아니고 입식 생활인 독일은 한국에서도 요긴하게 썼던 매트와 상 그리고 앉은뱅이 등받이 의자는 가져오길 잘한 품목이다. 면제품은 한국이 좋기도 하고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초반에 어디 가서 쇼핑하는 일도 성가시니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옷(속옷과 양말은 2년치 챙겼다)은 챙겨오면 좋다. 나무 젓가락은 한인 마트에도 팔지만 금속 젓가락과 뚝배기 그리고 고무 장갑(독일 고무 장갑이 구멍이 잘난다)정도가 지금까지 유용하게 쓴다. 

해외 이사를 해 본 결론은 꼭 필요한 것을 잘 선별하되 덩치가 큰 짐(문 두짝 대형 냉장고 가져 오면 전기 폭탄!)은 최소화한다. 어디든 사람 사는 곳엔 현지 조달이 제일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게 된다는 것을 짐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분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직접 배웠다.

*가져와서 애물단지 된 것 : 극세사 이불(독일 세탁기가 의외로 작다. 세탁소에 맡기면 이불을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과 두꺼운 카디건(겨울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몇 일 없고 비가 자주 내리니 방수되는 겉옷이 요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