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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변기 막힘, 안 뚫려 젠장”

 

요가 수업 없는 날은 산책이라도 가야 하는데, 오누이의 하교할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산책은 마지막 순위로 최대한 밀린다. 그래도 오늘 하루치 걷기를 지금이라도 안 하면 걸을 짬은 나지 않는다. 아들 올 시간인데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핑계를 찾다가 엄마, 산책 간다.라고 호기롭게 문자를 남기고 집을 나선다. 3.4km 내가 자주 걷는 강변 코스를 40분 정도 걸려서 걷고 집에 오니 짧고 긴박한 문자가 도착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게임하느라 정신없을 아이가 어쩐지 엄마를 문 앞에서부터 반기더라니. 아들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막힌 변기를 뚫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안절부절못한다. 이런, 엄마도 젠장이다. “어쩌냐 아들, 엄마는 그런 거 못하는 거 알지. 변기는 아버님 담당 아니었더냐. 아버님께 부탁해 보거라” 퇴근해서 돌아온 남편에게 변기의 참사 소식을 알리니,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토하는 시늉이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옵니까, 울상이다.

 

부엌문을 열고 나가면 바로 화장실인데, 남편이 그곳에서 뭔가 열심히 하는 건 같은데 신통하게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여보, 잘 안돼? 파이팅!” 괜히 위로하는 척만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사잇문을 살며시 닫는다. 독일 화장실이 특히나 잘 막힌다. 아마도 석회수가 많은 게 이유일 거라고 짐작된다. 아들은 아빠에게 막힌 변기를 맡기고 속 편하게 소파에서 간식 먹으면서 핸드폰 삼매경이다. 엄마는 괘씸한 마음에 아들에게 소리를 꽥 지른다.

 

“야! 아들, 아빠와 고통을 분담해야지. 너 혼자 게임하는 건 반칙이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 손잡아 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덜 죄송하지 않겠냐. 빨리. 아빠 곁으로 가서 도울 일이 없는 지 상황을 지켜봐. 아빠가 무슨 죄라니”

 

아래층에서 나는 시끄러운 소리에 딸은 무슨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이 2층에서부터 쿵쾅쿵쾅 시끄러운 소리로 내려오면서 야단법석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밑에서 뒷짐 지고 서 있던 오빠는 관심 갖는 여동생을 막으면서 "넌 보면 안 돼! 동심 파괴야" 못 내려오게 몸싸움이다. 그러다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 노래를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다시 대동 단결하는 모습이라니.

 

“사랑을 했다.

우리가 만나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볼만한 멜로드라마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널 사랑했다”

 

노래 소리에 엄마는 다시 '아효, 또 시작이구먼. 아이고 시끄러워라' 문 빠끔히 열어서 보니 ”갈비뼈 사이사이가 찌릿찌릿한 느낌“ 남매는 갈비뼈 긁는 시늉을 하며 아주 제대로 심취다. 엄마는 옆집에서 민원 들어오는 거 아닐까,라고 걱정하면서 다시 문을 닫는다. 변기 뚫는 아빠 옆에서 뭐라도 돕던지 고통을 분담하라 했더니만 랩을 한다. 아이고 머리야.

 

이런 극한 직업이 없다면서, 남편은 하루가 너무 길다면서. 아들이 막히게 한 변기를 뚫고는 얼굴이 노랗게 질렸다. 이런 아빠 심정 알턱 없는 아들은 묻는다. "엄마, 나 어릴 때는 내 똥 사진도 찍어서 아빠한테 보내고 그랬다며" "그래, 그랬지. 그땐 니 똥에서 냄새도 안 났어. 예쁘긴 얼마나 예뻤다고. 바나나 똥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이젠 변기를 막히게 해서 아빠의 구토를 유발하고 엄마 코도 틀어막게 하다니! 오 마이 갓!이다. 이 녀석아.

 

"네 아부지, 아주 대박인 날이다. 가서 애도를 표해라. 아들아. 감사도 잊지 말고. 너도 나중에 니 아들이 변기 막혀놓으면 저렇게 뚫어줘야 하는 거야. 할 수 있지? 아들” 아들은 머리를 감싸 안으면서 안돼. 괴로운 시늉을 한다. “엄마, 나 그냥 비혼으로 살게. 힘들게 회사 일하고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변기까지 뚫어야 하면 오우 노우” 오늘은 니 아버지께서 변기만 뚫으신 게 아니시란다.

 

솔직히 지루하고 따분한 독일 생활에서 심심할 틈이 없다. 날마다 버라이어티의 연속이다. 사건 사고도 잦고 남매가 사이좋게 지내는 날도 물론 있지만 싸우는 날도 다반사에. 그건 뭐 우리 부부도 매일 그러니, 오누이의 갈등을 욕할 수도 없다. 대신 잘 싸우고 화해만 잘합시다, 를 외칠뿐이다. 매일 밥을 짓고 치우고 지지고 볶는 보통의 날들. 잦은 괴로움과 찰나의 행복 사이에서 헤맨다. 변기 막힘과 바나나 똥은 “지우지 못할 추억이 됐다” 변기는 뚫어뻥 없이 남편의 수고로 뚫렸고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아이콘의 노래 가사가 고단한 하루, 내 마음에 찰지게 착 붙는다. (21년 11월 20일에 쓴 글)

 

21년 7월 14일 Elsee am See 사진 찍을 땐 친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