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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고양이가 웬말이야 집에서 살아있는 생명체를 키운 경험은 큰아이가 대여섯 살 무렵의 거북이가 전부다. 그때도 그 또래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뭔가를 자꾸 키우고 싶어 하듯이 우리 아이도 그랬다. 가장 무난하고 조용하고 덜 성가신 녀석으로 거북이가 당첨됐다. 호두알만 한 거북이를 이마트에서 2만 원인가 주고 샀는데 한 5년을 키우니 진짜 떡두꺼비만큼 자랐다. 조용한 녀석이라고 할 일이 전혀 없는 건 아니고 먹이 주고 똥은 치워야 해서 물은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갈아줘야 했다. 언니 집에서 조카가 물고기 키우던 처치곤란 어항을 받아서 요긴하게 썼다.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무슨 책임감을 가지고 거북이를 키우겠나. 그 뒤처리는 모조리 남편에게 갔다. 신기한 게 그 딱딱한 등딱지를 지고 있는 생명체도 정은 있는지 남편이 욕조에 넣고 물.. 더보기
괜찮은 결말, 그거면 됐다 “변기 막힘, 안 뚫려 젠장” 요가 수업 없는 날은 산책이라도 가야 하는데, 오누이의 하교할 시간이 임박할 때까지 산책은 마지막 순위로 최대한 밀린다. 그래도 오늘 하루치 걷기를 지금이라도 안 하면 걸을 짬은 나지 않는다. 아들 올 시간인데 얼굴이라도 보고 갈까, 핑계를 찾다가 엄마, 산책 간다.라고 호기롭게 문자를 남기고 집을 나선다. 3.4km 내가 자주 걷는 강변 코스를 40분 정도 걸려서 걷고 집에 오니 짧고 긴박한 문자가 도착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게임하느라 정신없을 아이가 어쩐지 엄마를 문 앞에서부터 반기더라니. 아들은 자기가 최선을 다해서 막힌 변기를 뚫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된다고 안절부절못한다. 이런, 엄마도 젠장이다. “어쩌냐 아들, 엄마는 그런 거 못하는 거 알지. 변기는 아버님 .. 더보기
매니저 어딨냐고 그 한마디만 했어도 자주 가는 마트 에데카 인원 제한수가 지난주엔 100명에서 50명으로 줄었다(현재 다시 100명으로 돌아왔다). 고로 사용 가능한 카트가 50개, 카드 없이는 마트에 입장 불가라 빈 카트 기다리는 사람이 줄을 길게 선다. 마트 한 번 가는 것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로스만은 약간의 식료품과 세제 휴지나 비타민 등을 파는 생활 용품점인데 이곳 인원수는 20명이다. 다행히 카트 대신 바구니를 들어도 되니 좀 더 낫다. 샴푸나 비타민 세제를 살 때 주로 이용한다. 장보기 리스트에 마스크팩을 사려고 적었는데 마침 세일로 2유로 자리가 1.35유로다. 요즘 피부 관리에 신경을 못 쓴 것 같아서 4개를 담았다. 독일은 계산 후 영수증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잘못 계산된 경우가 잦다. 최악은 사지 않은 물건이 찍.. 더보기
묵은지가 삼겹살과 찰떡궁합일지라도 바야흐로 독일엔 그릴의 계절이 왔다. 집집마다 단체로 그릴 파티를 하는지 걷다 보면 자욱한 연기와 함께 고기 구워지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코를 벌름거리며 오늘은 또 누구네가 고기를 굽나 부러워한다. 마트엔 그릴용 숯부터 그릴용 소시지와 치즈까지 그릴에 필요한 모든 용품이 대폭 늘었다. 남편은 매주 전단지를 보면서 그릴 용품에 눈독을 들인다. 난 그릴은 환경오염의 주범이라고 어떻게든 철벽 수비 중이고. 물론 햇살 좋은 날의 그릴과 맥주는 낭만이고 즐거움일 테지만. 식탁에서 고기를 제거하는 일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혼자 살면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이 또한 인식의 변화를 겪으며 시행착오를 거쳐 완전히 끊기까지의 시간은 걸린다. 과거의 식생활을 돌아보니 난 그렇게 .. 더보기
오월엔 미처 오르지 못한 곰배령으로 다섯 번째 딸인 내겐 엄마 같은 언니가 넷이나 있다. 큰언니와는 나이 차이가 무려 12살이다. 조카는 아홉에 우리 집 오누이까지 합치면 애들만 총 열한 명인 대가족이다. 엄마는 다섯 딸을 낳고 키우시느라 무척 고생하셨겠지만 미혼일 때에도 좋았지만 결혼 후 자매애는 더 끈끈하고 돈독해진다. 여자들이 잘 뭉치니 함께 사는 남자들도 덩달아 잘 모인다. 대부분 셋째 언니 집에서 모였는데 무슨 메뉴든 맛있게 뚝딱해내는 둘째 언니 덕에 난 매번 감탄하며 배부르게 잘 먹었다. 막둥이인 남편은 네 명의 형부들과 고스톱 치며 왁자지껄한 때가 가끔 떠오른다. 집에서 북적북적한 가족 모임도 좋지만 여자들끼리 오붓이 떠나는 여행을 가자고 어느 날 누군가 제안했고 우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남편들을 모두 뺐다고 오붓해지진 않았.. 더보기
자유한 고독을 향해서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인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고요함에 머무를 권리, 타인에게 침해당하지 않는 자기만의 온전한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이들일지라도 함부로 불쑥불쑥 나의 자유 시간을 침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하는 일의 집중력을 함부로 깨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인 고독은 내가 가 닿고 싶은 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고 꿈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는 토대가 된다. 때로는 분노를 삭이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내 목소리를 또박또박 말할 힘을 기른다. ”내 욕망의 많은 것들이 전부는 아니라도, 적어도 일부는 내가 살았던 곳에서 비롯되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욕구, 고정된 성 역할을 거부하는.. 더보기
새 놀이엔 새로운 행운이 새로 이사 갈 동네에서 딸이 다닐 학교가 정해졌다. 독일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4학년 C반이란다. 작은 마을이라도 서너 개의 초등학교 중 골라야 했는데 어디가 괜찮은지 기슬라가 정보를 줘서 결정이 쉬웠다. 기슬라는 남편이 현재 살고 있는 에어비앤비 주인.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큰 목소리만큼이나 호탕하고 유쾌해서 나이 드신 분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우리 가족까지 살뜰하게 챙긴다. 계약한 집 정보도 알려주고 잘 되길 응원하고 마스크를 가족 수만큼 직접 만들어주셨다. 남매 학교도 적극적으로 알아봐 주셨고. 그뿐이 아니다. 그녀는 출가한 아들한테서 보드 게임(Rummikus)을 우편으로 받아서까지 선물했다. 초등학교 이상 애들 있는 집에서 함께 했을 법한. 독일의 전통 게임 같다. 애들을 위해서.. 더보기
내키지 않아도 우연찮게 딸의 책장을 정리하는데 라고 쓴 파랑 색종이를 접어 만든 봉투가 툭 떨어진다. 뭔가 싶어 열어보니 여러 번 꾹꾹 눌러 접은 연초록 색지 위 남편의 필체다. 그것도 2018년 11월 19일이라는 날짜가 또렷한. 남편이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딸이 혼자 뭔가에 몰두한 틈을 타 부치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 자기 마음이나 달래려고 쓴 모양이다. 특별한 내용 없이 그저 담담하게 아이들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형식적인 내용. 편지 시작과 끝에 반복적으로 쓰인 가 왠지 모르게 뭉클하다. '이 남자, 부모님이 진짜 보고 싶은가' 말에선 느끼지 못한 그리움이 글에선 진하게 전해진다. 남편이 쓴 편지를 발견한 다음 날, 남매에게 아무래도 너희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