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딸인 내겐 엄마 같은 언니가 넷이나 있다. 큰언니와는 나이 차이가 무려 12살이다. 조카는 아홉에 우리 집 오누이까지 합치면 애들만 총 열한 명인 대가족이다. 엄마는 다섯 딸을 낳고 키우시느라 무척 고생하셨겠지만 미혼일 때에도 좋았지만 결혼 후 자매애는 더 끈끈하고 돈독해진다. 여자들이 잘 뭉치니 함께 사는 남자들도 덩달아 잘 모인다. 대부분 셋째 언니 집에서 모였는데 무슨 메뉴든 맛있게 뚝딱해내는 둘째 언니 덕에 난 매번 감탄하며 배부르게 잘 먹었다. 막둥이인 남편은 네 명의 형부들과 고스톱 치며 왁자지껄한 때가 가끔 떠오른다.
집에서 북적북적한 가족 모임도 좋지만 여자들끼리 오붓이 떠나는 여행을 가자고 어느 날 누군가 제안했고 우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남편들을 모두 뺐다고 오붓해지진 않았다. 제일 어린 내가 발 빠르게 장소를 섭외하고 날짜를 잡았다. 애들도 많이 컸으니 더 나이 들기 전에 다섯 자매가 함께 하는 여행은 의미 있겠다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싶다. 일 년에 최소 두 번은 떠나자고 했는데 다섯이서 하루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의욕 충만했던 첫해만 봄, 가을로 두 번이나 여행을 추진했다.
첫 번째는 2013년 5월에, 강원도 동해를 거쳐 곰배령 근처의 휴양림에서 하룻밤을 묵고 곰배령을 오르는 일정이다. 그때 넷째 언니네 막내는 초등학생, 내 딸은 두 살 때라 껌딱지인 딸만 특별우대로 끼워주었다. 언니들 애들은 모두 커서 밥걱정은 안 해도 될 때다. 그놈의 밥에 대한 책임은 엄마가 된 딸들을 오랫동안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셋째 언니 차로 근처에 살던 나와 딸을 태우고 인천과 수원에 사는 언니 둘이 은평구 사는 둘째 언니 집 쪽으로 집합하면 태워서 동해로 출발하는 동선이다. 다섯 명의 여자가 한 차에 다 모이기까지도 얼마나 정신이 사납던지. 그래도 마냥 들뜨고 즐거웠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싸온 간식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여행의 들뜸을 만끽했다. 하필 그때 딸은 바나나 우유가 먹고 싶단다. 엄마는 안된다는데 외할머니 같은 셋째 언니가 괜찮다면서 먹였다. 스무 개월 아이가 그 많은 양을, 240ml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빨대로 쭉쭉 들이킨 후의 만족스러운 표정이란. 그 옆에서 오구 오구 잘 먹는다고 흐뭇하게 쳐다보던 이모들의 표정과 반대로 그 후에 일어날 참사를 난 예감 했다. 혹시나 했는데 딸은 출발하자마자 바로 내 품에 안긴 채 바나나 향 그대로 어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바나나 우유가 계속 나오던지. 갓길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어렵게 옷을 찾아 뒤쪽에서 옷을 겨우 갈아입었다. 하루 종일 바나나향이 따라다닌 날,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야단법석을 친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동해 안개 자욱한 언덕을 오르면서는 운전 베테랑인 언니도 앞이 보이지 않아서 벌벌 떨었다. 뒤에 탄 우리들도 사방이 온통 희뿌연 안개에 어떡하냐고 우왕좌왕하면서 숙소에 도착했다. 다음날은 예약해야지만 입장 가능한 곰배령으로 향했다. 곰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있는 모습이라서 곰배령이란다. 어린 딸을 데리고 높이가 천 미터가 넘는 곰배령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중간쯤 계곡 근처에서 놀면서 정상까지 올라간 언니들을 기다렸다. 정상에 야생화가 한창인 모습이 보고 싶었지만 욕심부리진 않았다. 곰배령 오르는 길목 언저리에서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딸과 다람쥐도 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이모를 기다리는 시간도 좋았다.
그 후에도 청풍호 자드락 길을 걸었고, 인천 신리도 바닷가 근처의 쩔쩔 끓던 황토방까지 추억이 새록새록. 깍두기로 끼워준 꼬맹이 딸은 이젠 엄마 없이도 며칠은 지낼 만큼 컸다. 나도 이젠 언니들처럼 끼니 걱정하지 않고 혹을 뚝뚝 떼어놓고 자유 부인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데 하필이면 독일이라니. 물리적인 거리가 참 야속하다. 한국도 독일도 아닌 제3국 어디라도 좋으련만 코로나 창궐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다. 네 번째 여행지는 어디가 될지 모르지만 그때 오르지 못한 곰배령을 다시 가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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