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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자유한 고독을 향해서

 

“자기만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인 자기만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은 고요함에 머무를 권리, 타인에게 침해당하지 않는 자기만의 온전한 시간을 확보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아이들일지라도 함부로 불쑥불쑥 나의 자유 시간을 침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하는 일의 집중력을 함부로 깨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시간인 고독은 내가 가 닿고 싶은 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고 꿈을 이루는 발판을 마련하는 토대가 된다. 때로는 분노를 삭이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생각을 정리해서 내 목소리를 또박또박 말할 힘을 기른다.

 

”내 욕망의 많은 것들이 전부는 아니라도, 적어도 일부는 내가 살았던 곳에서 비롯되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욕구, 고정된 성 역할을 거부하는 마음, 자기만의 방과 나의 자리에 대한 애착처럼. “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중에서

 

독일어 수업 시간 단골 주제는 ‘자유시간‘이다. 자유시간이 생기면 주로 뭘 하냐는 질문이다. 대부분이 운동이나 요리를 하는 등 자신만의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야기를 나눈다. 난 대번에 아이도 남편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제일 중요한 자유시간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이런 속뜻을 이해하는 사람의 웃음소리가 비대면이지만 느낄 수 있다. 결혼 후 아니 정확히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 혼자만의 시간은 늘 간절한 자유다. 새벽과 요가 그리고 글쓰기와 걷기가 모두 혼자만의 시간 속 자유로움과 맞닿아 있다.

 

오랜 시간 자리의 투쟁은 곧 권력이 투쟁이었다. 가부장제 아래 할머니가 가장 큰 방을 차지한다는 건 아들을 가진 자의 권력이고 가족 중 유일하게 엄마만 다른 성을 사용한다는 건 '영원한 이방인'이어서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4인 가족, 평균적으로 방 세 개인 집에서 산다고 가정했을 때 엄마에게 방이 돌아올 확률은 지극히 낮다. 자녀의 성별이 다르다면 더더욱. 성별이 같아서 한 방에 자녀가 쓴다고 해도 대부분은 아빠의 서재라는 이름은 자주 들었지만 엄마의 방, 혹은 엄마의 서재는 여전히 낯선 단어다. 버지니아 울프가 경제적인 독립과 자기만의 방을 그 오래전에 언급한 이유는 오랫동안 여성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독일에 오기 전까진 계속 아파트 생활을 했다. 신혼 땐 충주의 17평, 다음엔 익산의 23평 둘이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남편은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집착이 없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 나 혼자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늬만 부부 서재다. 아이가 태어나서 잠자리 독립까지 나만의 공간은 늘 중요했다. 아이가 어릴 땐 집안의 어느 곳에서도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 어려워서 틈만 나면 카페로 나갔다. 어린아이가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내 일도 할 수 있으려면 거실에 책상을 놓기도 했고. 지금의 집에 살기 전엔 피치 못하게 부엌을 내 공간으로 삼았다. 아이들 방과 떨어져 있고 거실과도 분리된 독립된 공간이라 식사시간 외에는 널찍하게 이용했다. 양주 카페 꽃피다 2층 다락에선 첫 책의 초고를, 슈바니비데 스타케 2층에서 퇴고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남편과 닷새의 냉전이 있었는데 그때 내 방의 존재감이 확실했다. 부부 침실은 남편에게 줘버렸다. 내 서재에 발마사지 용도로 침대를 뒀는데 냉전시 잠도 따로 잘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던지. 천국이 따로 없다. 부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침대를 써야 한다는 말이 늘 진리는 아니다. 부딪히면 싸움으로 격해질 우려와 함께 화해할 여지도 있기 때문에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생긴 거 같다. 하지만 이젠 의무감으로 혹은 아이를 생각해서 물 베기처럼 허술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화해하고 싶지 않다. 이런 기회로라도 가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을 만큼 솔직히 좋았다. 투명 인간처럼 서로 없는 듯 보낸 시간을 통해 깨달은 바가 있지 싶다. 남편하고 싸웠는데 나 홀로 시간을 보낼 공간이 없으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독일에서 두 번째 사는 집은 4인 가족이 각자의 공간을 쓸 수 있어서 갈등의 여지가 없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다른 층에 있다는 게 퍽 좋다. 비싼 월세가 아깝지 않을만큼. 남편은 집을 구할 때부터 온전히 독립된 방을 아내의 서재로 쓰기에 딱이라고 점찍어 둘 정도로 나의 공간을 존중한다. 문칸방처럼 현관에서 가깝지만 안채에서 가장 멀리 있는 방이라 제일 마음에 든다. 결혼 이후 가족과 분리되는 걸 경험하지 못해서 자주 괴로웠다. 가족은 ’ 한 팀’이라는 명제는 부담스럽다. 가족도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할 때 건강한 관계로 오래 잘 살겠다. 아이가 장성할수록 그에 맞는 옷을 갈아입는 게 필요하다. 특히나 엄마의 공간과 시간이 보장될 때 가족도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