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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여행/추억 소환 국내 여행

[여행] 경주 가는 길에 들린 정방사 자드락 길

2016년 7월에 독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6개월 전이 극도로 심한 스트레스 상태였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해외 이사가 제일 힘들었다. 짐이 늘어날수록 비용도 늘어나니 불필요한 것은 빼고 필요한 것은 빠지지 않게 챙기느라. 아직은 어린 남매에게 환경이 바뀌었을 때 최대한 정서적인 안정감은 그대로 유지하려고 아이가 아끼는 장난감과 책 등의 물건들을 세심하게 챙기느라 더 힘들었다. 그뿐 아니라 해야 할 일은 해내면서 한국을 떠나고 난 이후에 덜 아쉽기 위해 '소중한 사람'은 만나고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2월에 경주 가족 여행과 7월 초에 셋째 언니 가족과 떠난 안동 여행은 역시나 참 잘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한국의 아름다운 곳을 추억으로 남긴 일은 현명했다.

 

제천 정방사에서 내려가는 자드락(낮은 산기슭에 비스듬히 나 있는 좁은 길) 길

경주 가는 길에 들린 제천의 정방사 자드락 길은 또 가고 싶은 곳이다. 네 명의 언니들과 여행했던 곳인데 좋아서 가족과 함께 들렸다. 정방사로 올라가는 산기슭은 평화롭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 볼 일이다" 정방사 해우소에 붙은 고은 시인의 '삶'이라는 시 한 구절도 음미했다. 힘들 때 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이상하게 뭉클하고 힘이 된다. 지나고 보면 혹은 멀리서 보면 비극도 희극처럼 보인다더니 지금에서야 떠올리니 큰 일을 앞에 두고 각자의 두려움을 서로에게 투사하며 매일 같이 싸웠던 팩트는 저 멀리 희석되고 그 와중에 여행을 떠나서 좋았던 기억은 남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현실에선 무용지물일 때 집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여행이라는 걸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경주는 우리 부부가 둘만이 간직한 추억의 공간을 다시 경험하려고 선택했다.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13년 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왔던 경주에 둘이 아닌 넷이 되어 다시 갔다. 아이가 없어서 불행했던 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뭔가 자극이 되었다. 메튜 캘리가 말하는 친밀함에서 말하는 친밀함의 일곱 번째 단계는 "서로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뿐만 아니라 이를 얻을 수 있도록 서로를 돕는 것" (215쪽)이다. 위기의 순간에 부부 공동의 목적을 확인하고 서로의 필요를 어떻게 채워줄 것인지 방법적인 면들을 모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친밀함의 고차원 단계에 다다르기 위해선 우선 긍정적인 관계가 기반이 되어야 하기에. 감정이 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이밍을 잘 맞추어 상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건강하고 말하고 그것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솔직히 말처럼 쉽지 않다. 결혼 생활 최대 위기를 경주 여행으로 한고비 넘겼다. 

 

부부의 스트레스는 자동으로 아이에게 전달될 테니 조심해야 하는데 부모도 인간인지라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아이들은 아이대로 천진난만해 보여서 고맙다. 새로 리모델링한 아기자기한 예쁜 펜션에 묵었는데 방 옆에 따로 놀이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서 좋았다. 그곳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보드 게임과 DVD가 있고. 예전부터 우리 가족은 보드 게임을 즐겼구나. 조식은 간단한 토스트와 컵라면이어도 괜찮았다. 한편이 공사 중인 불국사와 야경이 아름다운 안압지, 천마총 등 유명 관광지도 좋지만 경주 바로 옆동네 포항 가는 길목의 바닷가에서 놀던 아래 사진이 더 좋다. 경주가 목적지였지만 가는 길목에서 들린 정방사나 경주를 벗어나 포항의 바닷가 같은 샛길들. 기대 없이 들어간 허름한 식당에서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을 발견한 것처럼. 인생도 어쩌면 계획대로만 되는 건 아닐 거다.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지만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이 험해서 괴로울 때 잠시 떨어져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중요한 본질을 다시 점검할 여유를 갖기에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 지나고 서야 다시 깨닫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