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는 <애도 일기>에서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을 부르던 ‘나의 롤랑, 나의 롤랑’ 이 환청처럼 들리고 집 곳곳에 엄마의 손길이 느껴져 괴롭다. 집을 떠나 어딜가나 엄마와 함께했던 추억을 떨칠 수 없다. 소중한 이가 곁에 없는 고통과 슬픔이 어떤 것인지 그의 글에서 만져졌다.
독일로 오면서 경험한 헤어짐이 '짧은 죽음'에 비유한다면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과정은 바르트가 말한 애도의 감정과 비슷했다. 18개월이라는 애도의 한도는 어떻게 산정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정서적, 육체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데 걸린 시간과 같았다. 엄마를 잃은 슬픔은 사계절을 오롯이 한번 겪는 것으로는 당연히 부족할테지만.
얼마 전부터 알람에 의존해 일어나는 것 말고 몸이 알아서 일어나지는 새벽 기상이 가능해졌다. 한국과 8시간 시차가 나는 곳에서 한국 자정 시간인 독일 오후 3시엔 눈이 무거워서 저절로 감겼다. 배꼽시계만큼 정확한 내 몸이 신기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습관적으로 한국 시각을 확인했는데 늘 일어났던 새벽 5시라 왠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 시간에 일어나려고 들인 공이 생각나서.
밥도 좋지만 빵도 좋다. 딸이 ‘어두운 빵’이라고 부르는 딱딱한 Dunkelbrot(통밀 빵)가 맛있게 느껴진다. 호텔 조식에서도 부드럽고 촉촉한 빵 대신 직접 썰어 먹는 까만 빵을 제일 먼저 골랐고, 나도 모르게 역시 맛있다고 말했다. 간단한 독일 식단이 준비하기도 편하고 의외로 몸에 부대끼지 않는다. 하루에 한 끼도 밥으로 먹지 않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얼큰한 국물이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생각나지 않는다. 겉절이를 담그지 않은 지 벌써 2 주다.
친구 집에 초대받으면 생필품인 휴지나 세제 대신 꽃이나 와인을 준비하고 들고 간다. 일요일엔 문 여는 마트가 없으니 토요일엔 꼭 장을 보고 크리스마스엔 3일이나 휴일이지만 문 여는 상점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 24시간 편의점은 물론이고 자장면 한 그릇 배달시키지 못 하지만 세끼 꼬박 뭔가를 차려내는 수고로움이 억울하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가 싫지 않다. 가끔은 빗소리가 정겹고 폭우로 퍼 붇지 않고 수시로 가는 비가 내리는 날씨가 참 이상하다고 중얼거리고 외출하면 어김없이 비를 맞지만 그러려니 한다. 여름엔 한국보다 덜 덥고 겨울엔 덜 추운 날씨가 마음에 든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은 손에 꼽는다. 다만 오후 4시면 어두워지고 햇살 귀한 겨울엔, 해만 뜨면 감사가 절로 나오고 햇볕을 맞으려고 밖으로 나간다.
카페에서 홀로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마시는 커피나 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자주 생각한다. 한국어로 떠드는 말들이 다시 내게로 쏟아져 폭포처럼 맞고 싶어 괴로웠다. 첫해엔 친밀한 사람, 알던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 뿐 아니라 이곳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지루하다고 느껴졌다.
마음을 조금 여니 좋은 친구도 만났다. 종종 만나 거친 영어로 이야기 하는데 의외로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다. 이들에게 마음 주며 산다. 독일어만 들리는 곳에 있다가 오면 멀미가 날 것 같고 피트가나 클라우디아 만나면 진이 쏙 빠지곤 했다. 모국어로 말을 하거나 잘 듣는 일도 에너지가 상당히 소진되는 데 외국어는 오죽할까. 돌아와선 여전히 갈 길이 먼 영어에 더해 독일어까지 해야 한다는 게 형벌처럼 느껴져 한숨이 절로 났다. 돌아보니 독일어에 마음을 열고 적극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때도 신기하게 일년 반 될 때다.
절망, 어딜 가나 지루할 뿐, 무기력, 건조한 외로움 등 바르트가 애도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이 적응하면서 느낀 감정과 흡사해서 놀랐다. 기후뿐 아니라 음식 그리고 만나는 사람과 신체 리듬까지 적응 되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가시고 익숙해지기까지. 지금은 간신히 아무렇지 않을 무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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