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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곳보통날

승승장구했다면 과감히 떠나지 못했을지도

내 평생 처음으로 점집을 찾았다. 그때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내가 점집을 찾는 일은 드문 일이다. 절에만 가도 부처님상이 무섭고 향냄새가 낯설다. 둘째 아이까지 절대 양육 기간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때때로 사치로 느껴졌고 가계에 조금도 도움 되지 않는 출판은 요원한 원고를 붙들고 있는 내가 한심했다. 벌이가 불안정한 남편을 대신해 어린 남매와 원고를 내팽개치고 돈 벌러 나갈 용기도 없고. 남편을 집에 들여 앉힐 배포는 더더욱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꾸역꾸역 살다가 점집을 찾았다.

 

오누이는 엄마가 곁을 지키니 알아서 잘 자랐다. 살림이 빠듯해도 현재의 행복을 유보하지 않으며 대책 없는 부부는 자주 여행을 떠날 만큼 시간은 자유로웠다. 남편이 대기업을 자발적으로 나온 이후엔 헤드헌터의 수입은 들쑥날쑥했지만 십 년간 굶지 않고 살았다. 인생은 참말 어떻게든 살아지게 마련인가 보다. 대신 고정적으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은 자유로운 덕에 남편은 나를 도와 육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고 보니 우린 한국에서도 이미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았다.

 

백호당 할머니는 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남편에 대해서 점쟁이 같은 말만 해서 깜짝 놀랐다. 마침 그 무렵 우리 부부 모두 영어 과외를 하고 있었는데 집에 영어가 둥둥 떠다닌다고 했다. 내가 쓴 원고는 출판하기만 하면 대박 난다고 했고. 헤드헌터 5년 차엔 프리랜서로 전향한 후 기본급도 없는 상태라 남편은 독서토론 강사부터 과외 그리고 통, 번역 아르바이트까지 점쟁이 말대로 여러 가지 명함을 가지고 포트폴리오 수입을 창출했다.

 

1인 기업을 꿈꾸며 포트폴리오 수입이 자리를 잡기까지 기다리는 일은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조직을 떠난 지 오래라 재취업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웠다. 그렇다고 1인 기업으로 잘되는 일도 만만치 않고. 애 둘은 쑥쑥 자라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수입은 불규칙하고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에 미련이 생겨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다시 돌아가긴 요원했다. 지원하는 곳마다 쓴잔을 마셨다. 그때마다 남편의 낙담은 컸고 스스로 자신의 장래가 밝지 않다고 판단했다. 점점 자신감을 상실하는 남편을 보는 일은 더 괴롭고. 조직에 미련을 두는 남편이 못마땅했지만, 남편이 구본형이나 찰스 핸디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더 어려웠다.  

 

남편이 언제나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는데 어린아이를 두고 돈 벌러 나가지 못한 나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틈틈이 과외도 하고 도서관 강의도 하면서 조금씩 수입을 창출했지만, 가계에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나에게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라는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할 수도 없다. 거대 조직을 떠나 헤드헌터가 될 때도 프리랜서로 일할 때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사람은 나니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남편을 원망할 수도 없다. 늘 남녀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남편에게만 가장의 무게를 심하게 지우면 불평등할 테니까.

 

남편은 조직에 있을 때보다 분명 시간은 자유로웠다. 우리는 가끔 만약 그때 조직을 떠나지 않았다면 경제적으론 풍요로웠겠지만, 오누이를 갖기(남편이 대기업에 다닐 때 마침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도 힘들었고 어린 시절를 충분히 함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돈보다 시간이 많은 삶에 자족하기로 했다.

 

그 무렵, 대기업을 미련 없이 떠날 때와는 또 다른 비장함으로 독일 이민을 생각했을 것이다. 재산이 충분하지 않은 우리에게 한국에서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가족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남편은 생활 면에서나 아이들 교육 면에서 좀 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 방도를 모색했다. 영어권보다는 훨씬 안전하고 독일어만 배우면(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사회에 진입장벽이 낮은 곳이 바로 독일이라고.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한몫했고. 새로운 사회에 진입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나라 학교에 다닌 후 졸업하고 취업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 바로 취업이 된다면 당연히 제일 좋겠지만. 학교 다닐 때 유학이 꿈이었던 남편은 마흔 중반에 독일 유학을 준비하며 활력을 되찾았다. 벌써 독일에 산지 일 년 반이라니!

 

한국에 살았다면 남편은 가장으로서 끊임없는 자격지심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승승장구했다면 떠나지 못했을 거다. 외국에서 살면 더 잘 산다는 백호당 할머니 말이 가끔 떠오른다. 독일에서 잘살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2018 1 6)                        

                                                                                                                                                      

 

<2016년 9월 1일 남편이 독일 오는 비행기에서 챙긴 조커카드, 우리에게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며 한장씩 나눠가졌다. in St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