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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곳보통날

의사의 친절함에 반하다

대문만 하게 새로 난 딸의 앞니 두 개 옆의 헌 이가 며칠 전부터 흔들린다. 심하게 흔들리는 건 아닌데 썩어서 양치질할 때마다 피가 나고 잇몸이 붓는다. 불편하니 어떻게든 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 어제 치과에 다녀왔다. 방과 후 수업이 있는 화요일은 오후 네 시에 끝난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학교 앞에서 만나 바로 치과로 갔다. 관공서든 미용실이든 병원이든 약속(Termin)이 중요한 독일에서 무조건 간다고 진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응급 상황에선 예외가 있을 테니 일단 갔다. 이젠 요령이 생겨서 마지막 진료 때는 늘 4개월이나 길게는 6개월 후의 진료 약속을 잡아둔다. 확인해보니 다음 예약은 4 24일이다. 그만큼 약속이 꽉 잡혀있다. 예약의 일상화다. 아이가 아파하고 피도 났다니 얼마나 기다릴지 모르겠다며 접수는 해주었다. 역시나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다. 보통 예약을 하고 가도 한 시간 기다리는 일은 예삿일이라 더 기다리더라도 진료를 보면 감지덕지라 생각했는데 결국 두 시간 반을 기다렸다.


아들은 혼자 집에 있고  밖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심하다, 심해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릴까' 하며 지루했다. 의사를 만나니 신기하게 언제 두 시간 반을 기다렸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확 풀렸다. 만나자 마자 엄마인 나에게도 밝은 목소리로 자기 이름을 말하며 악수를 청한다. 딸에겐 나 알지?(원래 보던 담당의사가 없는 날이라서 두 번째 만난 의사) 만나서 반가워. 너 공주님처럼 예쁘다. 몇 살이야? 아이가 좋아할 만한 제스처와 목소리로 묻는다. 형식적인 립 서비스가 아니라 진정성 묻어나는 친절함이다. 되려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오래 기다리면서 짜증 난 마음이 녹았다.

 

진료를 보면서는 또 얼마나 친절한지. 화요일은 저녁 7시까지 진료라 끝날 무렵이라 피곤할 텐데 얼굴에선 전혀 읽을 수 없다. 마취하기 전에 무섭지 않게 마취 바늘에서 물방울을 떨어뜨려 보여주며 잠자게 하는 방울이라면서 아이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며 주사를 놓는다. 진행 상황을 쉬지 않고 말해주니 아이도 엄마도 무섭지 않다. 집에 돌아오면서 딸은 선생님이 계속 이야기를 해주니 아플 틈이 없었단다. 아랫니 중 아직 헌 이가 빠지지도 않았는데 안쪽에서 새 이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사과를 와작 깨물면 사과에 콕 박혀 이가 빠지기도 하니 참고하란다. 헌 이가 빠지면 새 이는 알아서 자기 자리를 찾아갈 거라면서. 

 

아침 7시 반에 집을 나와 학교에 간 아이가 치과 갔다 집에 오니 저녁 7시 반이다. 꼬박 12시간 만에 별 보면서 집에 온 딸은 하나도 아프지 않고 너무 친절해서 지루했던 마음이 사라졌단다. 뺀 이는 깨끗이 씻어서 하트 모양 통에 담아서 선물이라고 주었다. 진료가 끝나면 아이가 좋아할 작은 선물을 고르는 재미도 있어서 아이가 치과 치료를 그나마 덜 싫어하는 이유다. 어쨌든 끝나면 보상을 받으니까. 친절한 의사 덕분에 치료가 무섭지 않고. 

 

 

의사가 친절하면 좋지만 친절함까지 요구할 수 없다고 한국에선 생각했다. 독일에선 의사에게 권위를 찾을 수 없고 친절함이 몸에 밴 느낌이다. 대기실까지 직접 의사가 와서 웃으며 이름을 부르고 환자를 모시러 오는 것(물론 간호사가 오는 곳도 있다)도 생소한 풍경이다. 의사의 환한 웃음과 친절은 환자에게 심적으로도 큰 도움이다. 아픈 일도 서러운데 의사가 무뚝뚝하면 더 아플 것 같다. 의사한테 친절함이 필수 덕목이라고 생각 못 했다. 전문성과 친절함은 공존하기 어렵겠다고. 친절함에 더해 전문성까지 갖춰지니 신뢰감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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