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살면서 시간과 거리를 재는 척도가 달라졌다. 한국에서 배로 보낸 택배가 두 달이 넘어 도착해도 그런가 보다 한다. 무사히 도착만 해도 감지덕지다. 덕분에 오래 기다리는 법을 배우고 기다린 만큼 맛보는 즐거움은 배가된다. 안달하지 않고 적당히 잊고 있으면 시간은 흐르고 택배는 도착한다. 네 명의 언니들 중 큰언니가 올여름 방학에 제일 먼저 독일 우리 집에 온다. 재인이랑 통화하면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매번 장담하던 셋째 언니는 캐나다에서 유학하는 아들이 여름에 신검받으러 오는 바람에 못 오게 됐다. 니더작센주 2019년 여름 방학식은 7월 5일이다. 언니는 아이들 방학에 맞춰 7월 7일 일요일 오전에 도착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4개월 전인 3월에 끊었는데도 150만 원이다. 한국에서 브레멘으로 한 번에 오는 편이 없어서 네덜란드 스키폴 공항에서 환승인데 언니 혼자는 아무래도 무리라서 결혼한 딸과 함께 온다. 열두 시간 비행도 만만치는 않지만.
딸은 큰 이모가 독일 우리 집에 오는 비행기 티켓을 드디어 끊었다는 소식을 맨 처음 전했을 때 대번에 앗싸!를 외치며 엄청 기뻐하다가 "그런데 언제?" "응. 7월 7일, 한 네 달 남았어" "그렇게나 많이 기다려야 해?" 하며 바로 기운 빠져했다. 지난달엔 잠자기 전에 이모 오는 날짜를 세어본 모양이다. 백일도 안 남았다면서 좋아하길래. 백일에서 점점 날짜가 줄어들다가 70일 가까이 되었을 즈음엔 택배 도착한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니까 별로 안 남았네 그런다. 딸이 자꾸 이모 오는 날이 며칠 남았냐고 묻길래 스마트폰 다이어리 D-day에 7월 7일을 넣었더니만 매일 남은 날짜를 보여준다. 딸이 물어보면 즉각 알려줄 수 있다. 오늘로 이젠 61일 남았다. 진짜 얼마 안 남았다.
딸은 또 그런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데 겨우 일주일 있는 건 너무 짧은 거 아닌가?" "그렇긴 하지. 그래도 독일에 오는 것도 쉽지 않지만 길게 휴가를 쓰는 것도 어려우니까. 능력자(혹은 실행력 높은) 큰 이모니까 가능한 거야" 9박 10일의 일정에서 오가는 날을 빼면 엄청 짧긴 하다. "엄마, 이모 오는 거 생각하면 엄청 떨린다" "그래? 떨리기까지?" 딸은 묻는다. "이모는 엄마의 언니니까. 엄마도 이모 오면 엄청 좋겠네" "그럼 좋지. 신원이 언니 이후 가족은 처음이야." "엄청 보고 싶겠다" "그래도 그렇게 오랜 된 거 같진 않아. 신기하게. 아마 만나면 어제 만난 거 같을 걸" 하긴 우리가 이번 여름에 이모를 만나면 2년 만에 보는 거다. 2017년 여름에 한국에 갔을 때 이후 처음 보는 거니까.
7월 7일 일요일 오전에 브레멘에 도착해서 우리 집에서 삼일 묵고 베를린에서 삼일 놀다가 베를린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계획이다. 베를린 가는 이체(ICE, 한국의 KTX) 기차표도 예매했다. 최대 3개월 전부터 예매 가능한데 미리 끊어두면 엄청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이체로 브레멘에서 베를린까지 소요시간은 3시간이고 비용은 편도 보통 100유로가 넘는데 성인 기준 30유로에 예매했다. 아이들은 무료고. 딸이 기억하는 베를린은 맛있는 스테이크, 무진장 더워도 좋았던 이층 버스와 에어컨 없는 호텔이다. 이제 슬슬 숙박을 알아보고 여행 계획을 세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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