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오기 전 우리 가족의 독일어 수준은 남편은 B1, 나와 9살 아들과 5살 딸은 아베체 테(A, B, C, D)도 몰랐다. 독일어의 레벨 구분은 A1이 가장 낮고 다음이 A2, B1, B2, C1, C2다. C1정도면 학비가 거의 없다는 독일 대학에 입학 가능하고 독일 회사 취업도 가능하다. 얼마 전 겨우 독일어 B1코스를 마친 짧은 소감을 말하자면 독일어가 이렇게 어려운 줄 알았다면 절대 독일 올 생각은 못했을 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이럴 때 내게 딱 적합한 말이다. 지금은 독일어가 사람 잡는구나, 열심히 하자니 힘들고 안 하자니 괴로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시험 점수로 받은 레벨 말고 직접 소통이 되는지 여부로 볼 때 남편도 처음 관청에서 일 처리할 때 소통이 어려워서 독일어 가능한 사람을 데려오라며 돌려보내진 적도 있다. 독일 사람 대부분이 영어를 잘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공무원 중에는 꽤 친절한 사람(영어 가능자를 찾아서 돕는)도 있지만 냉정하게 독일어 잘하는 사람을 대동해서 오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6개월 후, 남편의 독일어가 소통 가능할 때 관청 직원의 태도가 180도 변해서 깜짝 놀랐다. 어찌 되었든 남편은 직접 부딪히면서 독일어가 늘었다. 절박함이 주는 힘이다.
나는 독일인과 접촉할 일은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한동안은 영어 가능한 사람만 접촉했다. 병원과 학교도 내가 만난 의사나 선생은 운 좋게도 영어 소통이 가능했다. 딸이 다니던 유치원엔 영어 가능한 사람이 귀했는데 담임에게 꼭 필요한 말을 전해야 할 땐 구글의 도움으로 준비된 말을 쪽지에 써서 전달했다. 나중엔 영어 가능한 사회 복지사인 피트가를 만나 아이 적응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통했다. 담임은 최대한 피하면서.
외국에 살아보니 어른의 경우 노력하지 않는 이상 저절로 언어가 늘기는 어렵다. 취약한 언어가 사회로의 진입을 막고 현지 언어를 사용할 일을 피하는 악순환이다. 외국에 살면서 현지 언어를 몇 마디 못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도 발견했다. 불편함과 좌절감을 어느 정도 감수한다면. 누구는 우스갯소리로 독일에서도 딱 네 마디만 하면 산다더니 내가 그랬다. 1년간 내 독일어는 ‘할로’와 ‘츄스’ 그리고 ‘당케 쉔'과 '엔트슐디궁'을 가장 많이 가장 그럴듯하게 썼으니까.
고작 네 마디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독학(A1) 그리고 개인 교습(A2)을 거쳐 어학원(A2, B1)을 지난달에 마친 상태다. 생활 반경을 넓히고 말을 못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일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 경우엔 강제성보다는 자발적으로 언어를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이 생길 때 적극적으로 시작했다. 언어 때문에 환경을 통제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성격 때문에. 빠르게 습득하는 아이들에 비교해 습득 속도가 더딘 것이 답답하지만 이 또한 나만의 속도로 가는 수밖에.
남매가 언어를 습득하는 속도는 놀랍다. 물론 초반에 딸은 독일 말만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유치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언어적 어려움으로 또래와의 긴 놀이가 어렵고 공격하는 아이를 방어하지 못하니 억울할 때도 있었다. 한편으론 안쓰러웠지만 힘들어도 친구들과 직접 부딪히며 하루 최소 3시간은 독일어 샤워 링을 받는 길이 외국어를 익히기에 가장 빠른 길이라 여겼다. 시간이 지나 때가 되면 알아서 방언이 터져 줄 거라 믿으며. 다섯 살 딸을 관찰해보니 독일어를 듣고 어딘가에 쌓여서 입이 트이기까지 6개월이 걸렸다.
외계어 같은 독일어만 하는 곳에 한두 시간 있어 보니 얘들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멀미가 나고 머리가 아플 지경이라, 남매가 유치원과 학교에서 돌아오면 조바심으로 독일어를 시키기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독일어에 노출되는 시간은 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시간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고 모국어에 신경 썼다. 남매에게 늘 했던 말도 "너희들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독일어는 점점 잘하게 될 거야. 오히려 한글이 걱정된다"였다. 우리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누군가는 집에서도 독일어를 쓰라지만 집에선 무조건 한국말을 쓴다. 아무리 외국어를 잘해도 모국어를 잃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 모국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아이가 엄마 대신 주인 할머니 사이에서 통역해줄 때면 솔직히 놀라서 물었다. "재인아 넌 이젠 친구들하고 말하는 거 어렵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거야?" 의심 많은 엄마는 꼬치꼬치 묻는다. 어느 날, 아이는 말한다. "엄마, 사실은 내 입에서 독일어 말풍선이 마구 터져. 어느 순간에는 뜻도 모르겠는데 말이 막 나와. 그런데 엄마가 무슨 말 했어? 한 번 해봐. 하면 기억이 안 나. 친구하고 말할 때는 막 독일 말이 잘 나오거든." 속으론 '그렇지 외국어를 제대로 습득하고 있구나. 엄마처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단어를 하나씩 조합해서야 어느 천년에 늘겠냐' 한탄하면서 "와, 진짜. 놀랍다. 우리 딸 진짜 대단해. 엄마는 네가 참 자랑스러워." 감탄한다.
이중 언어를 습득할 때 모국어와 같은 시간 노출되어 생활에서 반응하며 사용하고 어릴수록 훨씬 유리하다더니 정말 그랬다. 집 밖에선 어딜 가나 독일어니 남매에겐 최상의 조건인 셈이다. 독일어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투덜대는 마흔 살 엄마에 비교해 남매의 독일어는 거침이 없다. 신기할 만큼 빠르게 아이는 최소 6개월의 시간이 축적되니 조금씩 말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그 어려운 독일어를 습득하게 만든다. 생존인 셈이다. 자발적 의지를 끊임없이 발동시켜야 하는 엄마는 더딜 수밖에. (*5월 9일 브런치에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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