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삶이라는 집에 달려 있는 창문이고, 삶의 밭 사이에 나 있는 두둑길이다.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창문을 통해 삶을 엿보고, 문학이라는 길 위로 삶을 가로질러 간다. 문학으로 삶을 이야기한 것이다.(6쪽)” (문학과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삶의 자리 곳곳에서 문학이 시작되고 또 문학에서 삶의 위로를 받는다.)
문학의 사전적 정의란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시나 수필 소설 희곡 등이 바로 문학의 장르다. 언어로 표현된 예술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일까. 내가 현재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사람이 있다면 그와 비슷한 사건을 겪거나 유사한 인간상을 묘사한 작품을 읽으며 공감한다. 내 생각이 이상하지 않다거나 혹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기도 한다. 혹은 나보다 더 고통받는 인물을 통해 내가 느끼는 시련쯤은 까짓 아무것도 아니잖아, 라며 툭툭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내게만 유독 왜 이런 일이?라는 것들이 실은 인간의 보편적인 사건임을 알게 될 땐 안도한다. 그래, 이게 바로 인생이지! 라며.
직접 경험하기 어려운 다양한 인간의 유형뿐 아니라 내가 경험한 딱 그만큼의 시선으로 문학을 이해하기도 한다. 직감적으로 읽은 소설이 실은 신기하게 내 필요에 적중하곤 했다. 까뮈의 <이방인>은 내 위치가 현재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주 생각나는 책이다. 뫼르소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상식적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부조리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방인이라는 해석은 묘한 위로다. 경제적으로 궁핍할 땐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에 손이 저절로 갔다. 비참하게 가난한 제부쉬킨을 보면서 위로받기보다는 저렇게 지지리 궁상으론 살기 싫다라던가. 가난이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는 게 가능한가? 아마도 소설이라 가능할 거라 부인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예속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라는 <자기만의 방>의 버지니아 울프 글은 천군만마다.
“커피 없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살랑거리는 그 향이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머그잔 가득한 달콤한 커피가 삶을 생동하게 한다(16쪽)” 문학을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생기 있게 살게 하는 커피 향처럼 커피 좋아하는 이에게 그윽한 향기가 주는 위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듯이 문학도 그렇다. 스물 남짓의 감정을 작가가 정의하거나 해석한 문학 작품을 통해 간접 경험했다. 그중 지금 현재 가장 공감하며 위로된 감정은 절망과 유폐다. 나라면 충분히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견뎌내고 또 견디는 사람을 보면서 진짜 절망이 희망이 아니라 견뎌냄이 희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스물 남짓의 감정의 틈바구니에서 뿐 아니라 탄생, 사랑, 여행, 이별, 우정, 죽음도 어김없이 문학이 태어나는 자리다. 무수한 사연을 갖고 태어나는 ‘탄생’에서부터 살아있는 생명은 누구나 죽는다는 ‘죽음’까지 문학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주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삶과 동일한 여정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우린 ‘사랑’을 하고 마음을 준 만큼의 수만큼 ‘이별'을 한다. 거의 모든 문학의 주인공의 시작은 ‘떠남’에서 시작되고 ‘여행’의 과정에서 시련을 겪고 깨달음을 얻는다. 고초를 겪더라도 일상을 떠나 작은 깨달음 하나라도 얻는다면 그 떠남은 헛되지 않다. 소중한 벗이 주는 힘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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