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열두 살 하고도 반년이 지난)부터 엄마 키(165cm)를 따라잡더니만 발 사이즈도 나를 넘어섰다. 아들의 영원한 경쟁 상대인 아빠와 어릴 적부터 그렇게 힘겨루기를 하더니만 요즘은 아빠를 대놓고 넘본다. 몸은 이렇듯 컸는데 네 살 터울 동생과 티격태격할 때 보면 아직도 얘다. 어린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청년도 아닌 그 경계선 어디쯤에 있는 사춘기 아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없었다’ 과거형이라 다행이다.
아들과 어떻게 잘 지낼 것인가. 게임만 하는 사춘기 아들이 영 못마땅해서. 핸디에 코 박고 있는 아들은 묻는 말엔 건성건성 답하거나 묻는 말도 듣지 못해서 여러 번 물어야 할 때 열불 난다. 그놈의 핸드폰이 화근이다. 눈 뜨자마자 핸디, 학교 가기 전 그 잠깐 찰나에도 핸디,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틈만 나면 핸디를 붙들고 사는 아들이 밉상이다. 참다 참다 폭발. 애정 철회 작전을 펼친다. 내가 해준 밥을 먹을 땐 최소 와서 거들던지 준비를 도와라. 내 노동의 대가와 관련 없을 땐 니 알아서 해라. 눈 나빠질 까 봐 걱정하는 건 부모 심정이고. 그 많은 시간을 게임만 하며 낭비하는 게 아까워도 할 수 없다. 식당 아줌마 같은 느낌은 들지 않게 해라. 식당 아줌마는 밥값이라도 받지. 난 뭐냐. 의무적으로 밥 차리고 치우고 할 때마다 기분 나쁘다. 최소 눈은 마주치고 아는 척이라도 하고 말이라도 섞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속 시원하게 말해주었다.
남편이 아들을 상대해주면 좋으련만. 주말 부부의 단점이 이런 곳에서 드러난다. 아빠가 있는 곳으로 이사 가야겠다. 너는 여기서 살고 싶으면 피터 할아버지랑 둘이 살아라. 이젠 독립할 때(이건 좀 오버)도 되지 않았나. 이렇게 불화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감정적인 엄마가 분노를 내뿜고 아들이 화상을 입는다. 잠깐이지만 겁먹은 듯도 보인다. 아들을 몰아세운다고 속이 편한 것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치지도 온전히 품기도 어려운 게 자식이다. 품에 있을 때라도 말 좀 들었으면 싶은데 어디 그게 쉽나. 나도 뭐 꼭 그렇게 말 잘 듣는 자식은 아니었으니 할 말은 없다. 이런 순간에 부모 심정을 이해한다.
퍼부으면서 깨달은 사실은 부모만 자식에게 애정을 철회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남편이 온 금요일 저녁에 아들도 폭발했다. 아빠가 온 날 얘들은 더 흥분한다. 방패가 되어주는 아빠라서 더. 그간 쌓인 감정, 하고 싶은 말을 더 자유롭게 한다. 문제의 요지는 이렇다. 큰아이는 자기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동생과 싸우거나 동생이 잘 못했어도 자기가 매번 혼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다. 엄마의 불공정한 태도에 대해. 요즘 난 에너지가 금방 방전된다. 오랫동안 참지 못한다. 만사가 귀찮고 공정하게 판단하지도 못한다. 그냥 무조건 화를 내면서 갈무리를 해버리는 경향도 짙다. 일일이 따지는 것도 지쳤다. 중재는 남편이 잘하는데 주중에 부재하니 혼자 하는 것도 지친다. 부모는 공정해야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둘이 싸워도 마지막으로 더 괴롭히거나 네 살 터울 동생과 똑같이 하는 큰아이가 혼난다. 편파적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아들이 혼날 짓을 해서 혼낸다는 건 부모 입장이고 아이 입장에선 동생만 더 예뻐하고 혼낼 때는 매번 자기가 더 많이 혼나니 불만이 쌓인다. 아이가 미운 짓을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다. 둘째가 딸이니 아빠 사랑을 독차지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어리고 여자에다가 애교도 넘친다. 첫정인 큰 얘도 누가 봐도 저만큼은 못하겠다 싶을 만큼 예뻐했지만 아들은 짐작만 할 뿐 과거의 흐릿한 기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의 사랑이다. 동생에게 주는 사랑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너는 더 많이 사랑했노라고 동생이 태어나기 전의 시간은 너만의 특권이었노라고 말해주지만 먹힐 리 없다.
얘들 예뻐하는 건 추종을 부러워할 정도로 남편의 사랑은 차고도 넘친다. 주말에만 얘들을 만나는 남편이 제일 힘들어하는 건 매일 안지 못하는, 실체를 만지지 못하는 거다. 주말마다 얼마나 애틋한 지. 아무리 아들이 애교스럽다 해도 딸의 감성을 따라가기 어렵다. 아들은 어느 순간 아빠의 사랑(엄마는 아빠만큼 닭살 돋지 않는다. 그나마 주는 사랑은 공정한 편)을 포기했단다. 자신은 컸고 동생이 어리니 당연한 순리라고 받아들였단다. 자기에 대한 사랑이 줄어든 걸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지만 혼날 때 공평하지 못한 건 못 참겠다고. 맏이는 동생이 생긴 순간부터 계속 큰 아이다. 큰만큼 믿는 구석도 있지만 받는 사람이 공평하지 못하다 말하면 그게 맞겠지. 부모 노릇도 타성에 젖는다. 공정한 부모가 되는 건 더 어렵고.
'낯선곳보통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크리스마스 과자 만들기 (2) | 2019.11.28 |
---|---|
고유한 존재로 불리는 이름 (2) | 2019.11.26 |
남편의 빈자리 (0) | 2019.10.21 |
그러보 보니 가을 (0) | 2019.10.17 |
플레이스테이션과 우리 형편에 (2) | 2019.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