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바를 만나 삶의 열정과 비전이 회복되기를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삶의 열정을 온전히 회복했다고 할 순 없지만 회복하고 싶은 열망은 생겼다. 그처럼 열정적인 캐릭터는 현실에서 아직 만나지 못했다. 독일에 산 지 4년 차. 솔직히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도 없다. 독일에서의 내 비전은 안갯속을 걷는 듯 흐릿하다. 첫 책 쓰기보다는 끌리지 않지만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한 독일어 정복이 떠올랐다. 현재 독일어 위치는 B1. 2021년 B2, 2022년 C1 레벨까지 공부해야겠다는 세부 계획을 세웠다. 까짓, 정복해버리고 말지. 내 나이 마흔셋, 뭐든 할 수 있는 나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조르바가 두목이라 부르는 화자
비슷한 인물이 떠오를 정도로 주변에서 만날 수 있고 내가 호감 갖는 캐릭터다. 행동파 조르바에 비하면 굼뜨지만 모두가 다 조르바 같을 순 없으니까. 생각하느라 시간을 허비할 때도 많고 자주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신중한 면이 마음이 든다. 자주 반성하고 자신에게 부족한 미덕이 무엇인지 성찰할 줄 아는 캐릭터.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물 조르바에게 끌린다. 나였다면 거칠고 무례한 캐릭터와 조우했을 때 감당하기 힘들어서 바로 피했을 듯. 화자는 조르바에게 애정으로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경청) 그 사람이 하는 말뿐 아니라 생각까지 꿰뚫어 본다. 화자인 두목은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유형. 탁월한 공감력을 소유한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리스인 조르바>1장, 항구에서 헤어지는 친구의 충고(책벌레)에 분노하면서도 그 순간을 그리워한다. 자신의 병통을 인정하며 변화의 열망으로 승화시킨다. 나였다면 분노하고 그와는 결별했을지도.
조르바를 알아가면서 드는 생각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줄 안다. 신보다 인간의 위대함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물 조르바에게 자주 반하고 배운다. 최고의 장면은 춤의 언어를 구사하는 조르바에게 드디어! 화자가 춤을 배우는 장면이라고 꼽고 싶다. 두목의 도약, 춤의 언어를 배우고 그전까지 맛보지 못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는 순간. 자신은 결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 혹은 평생 무관할 것이라고 한계를 긋고 도전하지 못했던 것을 해봄으로써 해방감을 맛본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올까.
야생마처럼 자유로워서 거친 영혼 조르바
앞 뒤 재지 않고 일단 행동하는 조르바였기에 난생처음 보는 화자가 같이 가자는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다. 마음과 몸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바로 비터 같은 사람. 산투르를 연주할 때도 말이 안 돼서 온몸을 던져 춤으로 열정적으로 표현할 때도 갱도를 팔 때도 여자를 탐할 때, 심지어 먹을 때조차 조르바는 깊이 몰입(칙센트미하이가 개념화한 flow, 몰입 대상과 하나가 된 듯한 일체감을 갖고 자아에 대한 인식 사라짐). 한 번뿐인 인생 어정쩡하지 않고 화끈하게 사니 어떤 면에선 후회도 적지 않을까. 두려울 것 없으니 자유롭게 지금 이 순간을 뜨겁게 산다. 믿는 건 오로지 자신뿐. 한마디로 조르바는 어정쩡한 인물은 아니다. 화끈하다. 육체의 쾌락을 모르거나 얕보는 두목과 달리 육체를 돌보는 것이 바로 영혼을 돌보는 것임을 안다. 화자보다 행복지수는 훨씬 높아 보인다.
예전엔 여자 꽤나 밝히는 혐오스러운 캐릭터라 여겼다. 하지만 매사에 자유롭게 행동하고 몰입하는 기질이라 그렇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를 기막히게 파악하는 것도 그다.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화자와 조르바가 몰두하는 갱도는 다르지만 통하는 부분이 있다. 여자든 술이든 갱도든 화끈하게 빠져들고 끝장을 보는 조르바를 현실에서 만난다면 난 부담스러워서 피할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화자처럼 빠져들기는 힘들 듯. 화자의 언어로 말하자면 조르바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 같다. 조르바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으니 바로 나이 드는 것. 살아있음은 말썽 자체라면서 죽으면 말썽도 없다면서.
조르바와 두목은 만나지 못할 때 영혼이 밀착되어 상대방을 느낀다. 한쪽이 죽음에 이를 때 인간의 직감으로 느낄 만큼 애타게 생각하기에 가능하다. 조르바와 화자인 두목의 관계가 그렇다. 우연히 만나 중요한 관계가 되기까지의 인연을 단숨에 몰입해서 그려낸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로 상징되고 열정적인 사내로 그려진 그에게 그토록 깊이 매료되지 않았다면 쓰이지 못했을 이야기. 확연하게 다른 두 인물이 어떻게 친구가 되어 반하는가. 언어를 세심하게 다룰 줄 알고 타인을 관찰하고 공감할 줄 아는 화자가 있었기에 탄생한 걸작품.
'책그리고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0) | 2020.04.15 |
---|---|
[영화, 책] 눈먼 자들의 도시 (0) | 2020.04.07 |
[밑줄] 그리스인 조르바 (0) | 2020.03.06 |
[책] 아무튼, 비건 (0) | 2020.02.29 |
[책] 사무치게 낯선 곳에서 너를 만났다 (0) | 2020.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