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형적인 맏아들에 효자이기까지 한 남편이 독일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 쾌재를 부른 이유는 시댁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독일에 와서 한동안은 당신이 바로 '상급' 남편이라며 추켜세울 정도로 기뻤다. 그렇게 좋아했던 내가 한국행 티켓을 끊을 때까지만 해도 시댁은 까맣게 잊었다. 한국 갈 날이 다가오니 점점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과거의 억울한 일들을 들추어 남편을 도발해서 싸웠다.
한국에 도착해서 우리는 양주에 사는 셋째 언니집에 묵었는데 열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시댁인 여수까지 가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며느리인 저는 일정이 바빠서 같이 가려면 오래 기다리셔야 할텐니 손주와 애들 아빠가 먼저 가는 것은 어떠신지 용감하게 전화를 드렸다. 시댁에 가기 싫은 꼼수였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 시면서 기다리는 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며느리인 나도 꼭 같이 와야 한다고 못을 박으셨다. 일년 만에 한국에 들어온 자식을 열흘 만에 만난 시엄마는 기다리다가 눈에 진물이 날 정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며느리 입장에서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독일에서 친하게 지내는 가정 중 20대 초반의 남매를 둔 집이 있다. 스물셋 딸은 스웨덴에서 공부하고 스물하나 아들은 뒤쉘도프에서 학교에 다닌다. 남매 모두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다. 우리가 한국으로 출국 하루 전날, 클라우디아 부부는 여름 휴가로 2주간의 여행을 떠났다. 부부는 자전거로 이탈리아에 간단다. 독일 북부에서 뮌헨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서 뮌헨에서 자전거를 타고 산을 하나 넘으면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딸도 방학이라 곧 집에 온다길래 "딸은 어떡해요? 집에 혼자 있겠네요?" 오랜만에 집에 오는 딸과의 상봉은 하지 않아도 되나 싶어서 물었더니만 "스물세 살인데요 뭘. 딸은 스웨덴에서 혼자 여행하고 올거예요"라며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며 웃는다. "하긴 그렇죠." 나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이 반응했다. 스무살이 넘은 딸을 기다리다 일 년 만에 찾아온 여름 휴가를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였다면 몇 달(한한기)만에 집에 오는 딸을 만나고 가든지 아니면 데리고 같이 여행을 갔을 듯하다. 자식에 연연해 하지 않고 멋지게 부모 자녀 관계를 맺고 부부 중심으로 사는 그들이 한편으론 부러웠다.
‘도전하라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것처럼’를 쓴 수전 제퍼스는 배우자가 '전부인 삶'과 배우자와 '함께한 삶'은 다르다고 말한다. 배우자가 전부인 삶은 배우자를 잃었을 때나 실망했을 때 전부를 잃은 것이 되지만 삶의 다양한 영역 중의 하나가 배우자라면 충격이 훨씬 덜하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이 전부인 삶도 마찬가지다. 자녀는 머지않아 내 품을 떠난다. 자식이 떠나는 날, 날개를 달아 주고 상실감에 허우적대지 않기 위해 삶의 다양한 영역을 채우는 일은 당연하다. 수전 제퍼스는 여러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인간관계, 직업, 자녀 등과 관련된 구체적인 문제에서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9가지 영역으로 나누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론과 현실의 간격은 언제나 거리감이 존재한다. 남편에게 집착하지 않는 시엄마를 원하면서 나는 과연 아들에게 질척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삶의 다양한 영역을 채운들 아들을 다른 여자에게 뻇긴 후에 아무렇지 않을 엄마가 얼마나 될지 냉정하게 생각해본다. 누군가는 이런 굴레가 여자의 원죄라고도 할만큼 쉽게 벗어질 굴레는 아니라고도 한다. 내 아들이 장가들 무렵이면 시엄마를 깊이 이해하게 될까.
남편의 뼈있는 한마디를 외면하지 말아야지. 당신은 우리 엄마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걸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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