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목에 가시처럼 걸리는 것이 있다. 불공평, 그 중에서도 으뜸은 남녀차별이고 남아선호에 대한 저항이다. 성정체성을 찾기 전에는 남자라는 종족을 어떻게든 뛰어 넘어야겠다는 생각이 압도적이었다면 정체성을 회복한 후에는 남성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성'답게 존재하며 서로를 존중하며 살면 참 아름답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안에 지워지지 않은 상흔으로 남았는지 남성에 대한 증오심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겪지 않고 몰랐을 일들 그리고 아들이 없었다면 전혀 인지 못할 일들에 대해 고민한다. 아들을 낳고 키워보니 아들이라서 내게 귀한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존중 받아 마땅한데 오히려 내 안의 부정적인 남성상이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염려된다.
나는 이럴 때 불끈한다. 시댁에서 밥상을 차리다가 밥을 푸는데 시어머님이 밥을 푸시는 순위가 바로 서열이다. 아버님 그리고 남편 그 다음이 바로 손자인 내 아들 순위로 넘어갈 때 난 갑자기 열이 확 받는다. 아니, 엄마인 내가 어떻게 아들한테 밀릴단 말인가. 시어머님을 욕하기도 어려운 것은 본인은 맨 마지막 순위로 놓는다. 밥그릇도 밥상에 올리지 않고 찬밥을 드실 때가 많다. 이런 모습에 화가 난다. 그 다음부턴 무조건 내가 밥을 푼다. 서열은 다 무시하고 찬밥은 모두 공평하게 나누어 뜨거운 밥 안에 숨긴다. 밥 푸는 서열처럼 사소한 일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날 분노케 한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마자 젊은 여자를 집으로 들이신 아빠에 대한 증오심은 남성 전체 혐오로 번졌다. 재혼으로 일곱 번째에 기어이 아들을 보신 아빠의 아들 사랑에 증오심은 더 깊어졌다. 그 귀한 아들이 내게 칼부림을 했는데도 혼내기는커녕 아들을 감싸는 아빠를 보며 최소 공평하길 바랜 내게 아빠는 그날 내 마음에서 지워졌고 일말의 희망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 딱 10년만에 시댁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각본은 이럴 때 무섭다.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어떤 사건이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반복될 때 놀랍다. 명절에 시댁에서 일어난 시동생의 하극상은 10년 전 악몽 같은 사건을 떠올리게 했고 치를 떨게 했다. 의붓 남동생은 엄마, 아빠가 시골에 내려가신 후 어쩌다 자기가 나와 엄마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사춘기에 충격을 먹었는지 그 분풀이를 내게 했다. 시동생은 형에 대한 불만을 형수인 내게 한 셈이고. 분명히 시동생이 잘못했는데 십 년전 아빠처럼 시부모님은 모두 자기 아들 편을 들었다. 시부모님은 아빠와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던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격이다. 아빠와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가 다시 시부모님과 얽힌다. 친아빠도 주지 못한 사랑을 시부모님께 갈망한 내 잘못이다.
하긴 욕심 많으셨던 엄마가 12남매의 장남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겠다고 허약한 몸으로 넷째까지 딸을 낳고 다섯 번째마저 딸이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아들에 대한 욕심도 있겠지만 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아들도 딸도 한번 키워보고 싶은 여자의 욕심이다.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다섯 번째 딸이라는 자격지심이 뼛속 싶이 새겨진 것은 아닐까. 자꾸 그놈의 아들과 자꾸 내가 엮인다. 아빠가 결국 재혼으로 낳으신 의붓 남동생과 대판 싸운 일도 그렇고 10년 후 시동생의 하극상도 그렇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상이 내게 자꾸 들이대는 일이 생긴다. 무능력한 남성을 무시하는 마음이 내 안에 있다. 사람은 누가 자기를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기가막히게 알아챌테니 내가 알게 모르게 원인 제공한 셈이다. 조금이라도 불공평하거나 차별적 발언 앞에 여지 없이 무너지거나 발끈한다. 오히려 더 큰 저항심으로 남성을 미워하는 지경은 가지 말아야 할텐데 잘 안된다. 무능력한 남자를 무시하는 눈빛도 거둬들이자. 무조건 여성을 높이고 남성을 반대급부로 깔아뭉개는 역차별은 경계하고 싶다. 비뚤어진 시각을 버리고 균형잡힌 성 정체성을 갖으려면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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