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버지니아 울프는 1928년 10월, 여성에게 용기를 주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강연을 시작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그녀는 영국의 옥스브리지 교정을 거닐거나 강둑에 앉아 사색의 낚싯대를 드리운다. 역사 속에서 거의 언급되지 못한 여성의 위상을 이야기하고 셰익스피어의 누이와 여성 작가 메이 카마이클을 창조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12쪽)는 의견을 제시하고 자신이 “어떻게 방과 돈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최선을 다해” 보여준다.(12쪽) 픽션과 현실 사이를 절묘하게 왔다 갔다 하며 강연 주제를 이어간다.
여성은 왜 남성보다 가난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여성에게든 남성에게든 물질적인 풍요와 빈곤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있었다면 셰익스피어만큼 인정받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석탄 인부가 되는 것과 아이 보는 여자가 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을까?(56쪽) 다양한 질문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하는 형식은 바닥으로 떨어져 흩어지지 않고 사고의 파편을 이어준다. 게다가 전개 방식이 지루하지 않고 한 편의 소설을 읽은 듯 진중하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에겐 돈이 없었고 재능이 있더라도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다. “어느 성에게나 삶은 힘들고 어려운 영속적인 투쟁입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용기와 힘을 요구합니다." (50쪽) 여성에게 불리한 시대였고 가혹했지만, 남성에게 만만한 세상은 아니라는 인식의 균형도 잃지 않는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생긴 그때 마침 울프에게도 연간 500파운드의 돈을 숙모로부터 상속받게 된다. 밥값으로 10실링짜리 지폐를 지갑에서 꺼내면서 가난의 고통과 고정된 수입이 주는 안락함이 얼마나 좋은지 보여준다.
“경제적 자립은 마음의 자유, 즉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를 제외하면 19세기의 여성 작가들도 공동의 거실에서 제한된 경험과 인습적 통제로 고통을 받으며 분노와 경련으로 뒤틀린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다.” (394쪽) 작품 해설 중에서
19세기 중산층 가정의 자녀는 공동의 방(거실)에서 몰래 원고를 숨겨가며 글을 쓰거나 문학 훈련이라곤 감정 묘사와 성격 관찰이 고작이었지만 재능과 성실성으로 걸작을 쓴 작가가 있다는 것은 희망적이다. 제인 오스틴은 아이는 없었지만 그 시대 여성이라면(21세기 여성이라고 엄청 변하진 않았지만) 언제나 방해를 받고 자기만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은 고작 삼십 분에 불과하다. 노동 계층에서 천재가 나오기 희박한 것처럼 그 시대의 여성 중에서 천재적 작가가 나오는 일은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그런데도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는 자기만의 방도 없었고 연간 500파운드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걸작을 써냈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예속적으로 존재하는 여성이 아니라 독립적인인간으로 자기만의 이야기를 쓰라며 글쓰기를 권한다. 대신 각자의 성을 순전히 고집하기보다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건강하게 협력하여 존재할 때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서. 앞부분에서 이야기한 셰익스피어의 누이는 사실 글 한 줄 써본 적 없이 교차로에 묻혔다. 누이도 셰익스피어처럼 교육받았다면 거장이 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오늘날 현시대를 사는 여성인 누구에게나 위로가 될 듯하다. 19세기에 쓰인 글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 사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겨우 두 명의 자녀를 키우며 멸치 똥만큼의 수입으론 독립이 요원해 보이며 여전히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사는 내 마음은 불편하다.
고정 수입을 갖게 되면서 누리게 되는 자립심과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글 쓰는 공간인 자기만의 방이 주는 독립성을 경험하며 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간곡한 마음이 전해온다. 여성들에게 경고했던 “아이가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나이가 될 때, 여성도 전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다”라고 존 랭던 데이비스의 말에도 움찔해진다. '전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기 전'에 어서 자립해서 나만의 길을 가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