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반성문/밥만 해주는 게 아니고 욕도 먹인다.
엄마와 사별로 ‘엄마’라는 호칭조차 낯설게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 나의 숙명인 것처럼 내 아이에게 나 같은 엄마와 같이 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엄마일까. 감정 기복이 심하다. 최상주의자이면서 욕심이 많다. 불행을 행복보다 쉽게 느낀다. 다혈질에 화를 잘 낸다. 등등 부정적인 측면은 무수히 많고 글감은 넘친다. 요 며칠 화가 잦다. 화의 근원을 파고들면 결국 내 문제다. 아이들이 만든 상황은 그저 수면 밑에 있던 내 화를 건드렸을 뿐이다.
화 난 일 두 가지를 살펴봤다. 일학년이 된 재인이 학교 선생님과 상담이 있는 날이다. 남편과 같이 선생님을 만나 20분간 상담을 했고, 나는 바로 김나스틱 하러 체육관에 갔다. 남편도 저녁 수업으로 학교로 갔고. 보통 김나스틱 갈 때 남매가 한 시간은 충분히 집에서 놀 만큼 컸다. 상담이 있는 날이라 두 시간이 걸렸다. 한 시간은 DVD를 보고 나머지는 숙제하거나 놀라고 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다. 평상시 보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아이들은 밖에서 불량 식품에 집착하는 것처럼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운 사이 뭔가를 보는 것에 집착한다. 그래도 오누이를 믿었고 상담은 만족스럽게 끝났다.
아이 상담에선 담임으로부터 딸 칭찬을 듬뿍 들었고 김나스틱은 내 몸이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운동 잘 끝내고 가는 길에 ‘저녁은 뭘 해줄까.’ 딸이 며칠 전 도시락으로 싸달라고 했던 치즈를 저녁엔 사서 내일 도시락에 싸주어야지. 칭찬도 많이 듣는 딸이 기특해서 보상이라도 해주고픈 마음에 룰루랄라 집에 들어왔는데 아직도 DVD를 보고 있는 모습에 열이 확 받는다. 작은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더라도 큰 아이가 제어 못 한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솔직히 두 시간 뭐 본다고 큰일 나지 않는다. 내 의무를 충실히 행하지 못한 자괴감도 아니다. 마침 딸 선생이 독일 아이 중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방치된 아이들은 학습 능력이 뒤처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도 아니다.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상식에서 벗어나면 화가 솟는다. 한 걸음 떨어져서 관조하며 별거 아닌 양 넘어가고 스위치 전환 해야는 데 잘 안된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가 나고 불행을 느낀다. 뭔가 하나만 잘못 되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인 양 분리를 못한다. 내 완벽함에 흠집 생긴 것처럼.
다른 사건 하나는 집에 손님이 오는 날, 청소와 음식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남매는 꼭 누가 오는 날, 손님이 있을 때 더 흥분하고 싸우고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그렇다고 평상시에 싸우지 않거나 얌전한 것은 아니다. 평소에는 쉽게 넘어가던 일도 신경이 예민하거나 의지력이 소진되는 타이밍엔 내 절제력도 한계에 부딪힌다. ‘왕’이 왔을 때 한차례 위기를 넘겼다. 남매가 심하게 싸우다가 진정을 시켰는데 그 다음날 조카 있을 때 또 심하게 싸웠다. 급기야는 남편이 남매를 이층으로 올려 보내고 벌 세웠다. 내가 혼내는 건 괜찮은데 인내심 많은 남편이 나서서 큰 소리 내는 것은 이상하게 듣기 싫다. 남편에게 아이만큼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좋은 이야기만 듣고 싶은 것 아니냐고 투사한다.
두 사건을 종합해서 화가 나는 이유를 살펴보니 이럴 때다. 이젠 좀 더 잘해봐야지. 마음을 다잡을 때 그렇다. 오랜만에 집에 온 손님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지려는 찰나에 남매가 협조를 안 해서 기분이 나빠진 것이 못마땅하다. 남편과 산책을 하면서도 계속 상황을 복기하고 지적하고 따진다. 화는 낼수록 더 나고 주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 미련하게 멈추지 않는다. 가끔은 생각한다. 몸에 저주스러운 말들이 뼛속 깊이 새겨진 것은 아닐까.
몸이 기억해서 화가 나는 순간에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은 멈추기 어렵다. 또렷이 기억나는 말이 있다. “아들로 태어났으면 좀 좋았을까.” “엄마 잡아먹은 딸이다.” “부잣집 양녀로 보낼까.” 내 앞에서 대놓고 새엄마가 했던 말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농담처럼 웃으며 했던 말들. 새엄마가 했던 말은 모두 귓등으로 흘리고 무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사람이 어느 날 방언이 터지는 것처럼 내 안에 언젠가 떨어졌던 부정적인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내 몸에 오랫동안 갇혀있다가 탈옥한 것처럼.
아이가 어릴 적엔 긴장감을 느끼고 스스로 조심했던 말들이 십 년이 지나니 타성에 젖는다. 열 번 잘하다가 한 번 못하면 물론 다 망치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공들인 탑이 무너지게 만든다. 쉽게 불행을 느끼고 화가 나는 것은 어쩌면 내가 부정적인 말을 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딸은 화난 엄마를 감싸며 위로한다. "엄마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난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할거야." 그 말은 "엄마, 날 버리지 말아요. 나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세요."로 들린다. 정신 차리고 반성하며 "앞으로 더 잘해 주께."하면 "아니야. 엄마. 그냥 지금처럼 이대로도 충분해." 이 말은 곧 “엄마, 제발 더 잘해주려고 하지 말고 하던 대로 하세요”로 들린다.
이런 속사정 모르고 집에서 한나절 놀다간 왕은 ‘원더풀 키즈’에 ‘러블리 패밀리’라며 문자를 보냈다. 딸 담임은 우리 남매가 '어메이징'하다며 감탄을 쏟아내고. 후유, 내 속을 누가 알꼬. 남매에게 밥만 해주는 게 아니고 욕도 먹이며 사는 나는 배운 대로 못살고 성질대로 사는 애처로운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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