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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날들의 철학(무한한 순간들),나탈리 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무엇일까?

과도기에는 이 모든 질문이 중요하다. 그러나 희망에 대한 질문은 특별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허공에 발을 디디면서 새로운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37쪽)

 

독일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허공에 발을 디디면서도 새로운 발판을 만들어내는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누구나 예외없이 통과하는 인생의 과도기를 어떻게 건널까에 대한. 인생의 과도기란 어쩌면 위기의 순간이다. 예를 들면 이런 때다. 아기의 탄생, 사춘기, 갱년기, 애도의 시간이 그렇고 죽음이 그렇다. 죽을 것만 같은 괴로운 순간에 잉태되는 어떤 것들, 퍼올려질 한 줌의 지혜 혹은 본질에 한 발자욱 가까이 다가가는 시간에 대해 말한다. 

 

현재 내가 발 딛고 사는 곳에서 도통 무슨 희망을 품어야할지 몰라 힘들 때 함께 읽고 쓰는 모임의 마지막 책이었다. 둘째 아이의 절대 양육기까지 성실히 지나는 엄마는 이렇게 썼다. "내 이름으로 살지도 못하고 수입도 없지만 나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지점을 건너고 있기에 불안과 불완전함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여자와 아내, 엄마의 삼박자를 채워야 하는 현재 나의 삶은 5년째 과도기다. 그래서 잠재적인 창조의 씨앗을 품는 시간이며 육아의 시간을 온 몸으로 겪어내며 누군가의 그림자로 살아본 불확실한 날이 타인에게 도움이 되어줄 희망을 품는다."  육아기를 지나며 '불안과 불확실한 날들'에 몸을 맡기겠노라는 글은 고무적이다.

 

불확실한 날엔 어떤 철학이 도움이. 독일 땅에 착륙한 이후, 어쩌면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한 날들이다. 최소한 내게는. 이 책의 원제인 <Der Unendlich Augenblick>는 직역하면 무한한 순간이다. 예측 불허해서 불안하고 두렵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품는 시간이라는 의미는 아닐까. 겨울이 지나면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자연의 순리고 봄의 메시지는 희망이다. 혹독한 추위를 견디고 벚꽃은 열매를 생각하지 않고 꽃을 피운다. 유용성과 효율성을 따지기 보다는 그 순간에 충실하다. 내 삶에서 봄은 언제쯤일까. 혹시 지금 벚꽃이 만발한 봄인데 내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열매에 집착하다가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다 떨어지고 난 후에 미처 못 본 아름다움에 아쉬워하진 않을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어느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인생의 과도기를 통과하는 시간은 어둠이지만 어둠은 곧 끝날 테고 그 속에서 얻는 한 줌의 지혜가 있단다. 잠재된 창조성이 자라거나 아니면 '가장 평범한 것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고백을 진심으로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탈리 크납은 생의 안전벨트로 장착하면 도움이 될 다섯 요소인 신뢰, 희망, 수용, 사랑, 생명력을 말한다.

 

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람은 오뚜기가 아니라 폭풍우에 손상된 나무와 같다. 그 나무에 난 상처는 자연스레 아물며, 나무는 새로운 방향으로 계속 뻗어나간다. 그 나무는 결코 이전과 같은 나무가 아니다.”(193) 내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어쩌지 못하는 것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에 힘을 쏟는 지혜가 바로 수용이다. 폭풍우에 쓰러진 나무처럼. 신뢰하고 희망을 품고 수용하거나 사랑해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들은 모두 처해진 상황에서 선택하는 나의 의지와 관련된 것이다. 폭풍우가 불기 전으로 돌아가긴 어렵겠지만 조금은 달라진 삶의 자세로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억지로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 그냥 있고, 지금 자신이 경험하는 것을 가능하면 온전히 경험하며, 삶이 우리에게 예비하는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따라서 지금 진정으로 일을 하고, 지금 진정으로 사랑을 하며, 지금 진정으로 반항을 하고, 지금 책임을 감당하고, 지금 친구들을 초대해 음식을 나누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늘 받아들이고 내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미래의 빛은 현재의 순간들을 살찌우고 진정한 미래를 만들어낸다."(39쪽)

 

"기본 신뢰는 소망이 충족되지 않거나 바람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현재에 사는 삶에 가까우며, 지금 서 있는 바닥에 충실한 능력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능력이 아니며, 그러기에 논리적인 설명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적 본능에 가까운 무의식적인 확신이다. 기본 신뢰감이 전제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감 있게 삶을 살아낼 수 있고, 온갖 위기와 불행, 모순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의미 있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