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학부 때 전공은 유전공학이었으나 전공 외 문과 과목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 동기 중 전공만 공부하기도 버거울 텐데 영어 부전공에 학보사까지 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이성보다 더 끌린 아이를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작품을 다룬 러시아 문학 수업 시간에 우연히 만나면서 호감을 느꼈다. 지금도 친구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다. 성도 특이한 ‘위’씨다. 우린 서로 편지함에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하고 시집을 선물해주면서 문학소녀가 된 듯 했다. 어느 날 내가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친구가 그런다. “난 '밥 많이 먹는 엄마'가 될 거야.” 그 말에 난 ‘엉덩이 펑퍼짐한 엄마가 고무줄(몸 빼) 바지를 입고 양은 냄비에 밥을 비벼서 우적우적 먹는 엄마가 단번에 그려져서 웃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밥은 뭐 그렇게 많이 먹지 않지만 난 ‘엄마’가 되었다. 그 친구가 말한 ‘밥 많이 먹는 엄마’가 가끔 떠오른다. 친구는 ‘밥 많이 먹는 엄마’가 되었을까? 난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내가 엄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엄마는 아무나 되나?’ ‘엄마란 내가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한 영역’이라 늘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세 번의 유산을 거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첫 아이를 건강하게 임신하기 전, 엄마가 되고 싶어 얼마나 불안하고 안달을 했었는지 모른다. 아이만 가질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간절한 기도도 매일 드렸다. 지나가는 임산부만 봐도 부러움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고 질투심에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엄마가 된 여자가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다고 쏟아내는 모든 불평들이 그저 부럽고 육아로 인한 힘겨움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보면 소원이 없겠다고까지 생각했다. 띠로 아이를 매고 다니거나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다니는 아이만 봐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남편이 TV속의 아이에게 눈길만 주어도 가슴이 철렁 내러 앉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바꾸더라도 엄마로 살게 된다면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새벽에 확인한 임신테스트기 두 줄의 환희, 심장 초음파의 벌떡거림, 280간의 임신 기간 동안 매달 가서 확인하는 태아의 성장, 그리고 출산의 두려움 엄청난 과정을 거쳐 엄마가 되었다. 아무나 쉽게 엄마가 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된 것이다.
엄마들에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를 들라 하면 단연코 아이가 그 빛나는 성취에 포함된다. ‘엄마는 위대하고 모성은 빛난다’고 하면서 정작 아이만 전담해서 키우는 엄마들에 대해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구조를 볼 때 씁쓸하다. 남자들의 군대 3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힘든 시간이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면서 가산 점은커녕 ‘경력 단절’이라는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의 출산을 경험한 이후, 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진통이 시작된 날 분만실에 들어가면서 ‘벗어놓고 간 신발을 내가 다시 신을 수 있을까’라는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아이를 낳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떠올릴 만큼 고통스러웠고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내 평생 찾을 하나님을 그 날 가장 많이 찾았다. 고통 속에선 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확인함과 동시에 ‘고통의 강’을 건너 아이를 품에 안은 순간엔 ‘엄마’라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한편으론 ‘나의 엄마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낳으셨겠구나’ 12년 동안 다섯 번의 출산을 겪으신 엄마가 떠올라 숙연해졌다.
세상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겁 많은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일은 기적이다. 조셉 캠벨은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영웅이 되는 과정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엄마들은 모두 영웅이 틀림없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켐벨이 말하는 영웅과 비유할 만큼 엄청난 일이지 않는가?) 출산은 길어도 하루에서 이틀이면 끝나지만 한 아이가 사람 역할을 할 때까지 키워내는 일은 영웅의 할아버지(?)에 비유해도 부족하다. 엄마가 되어 자유를 박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간과 애정을 들여 키워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을 가져도 충분하지 않은가?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에서는 유독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밖에서는 천대와 멸시를 받고 돌아온 자식들에게 엄마가 해준 밥은 사랑이고 에너지다. 사회적 잣대로는 지지리도 못나 보이는 주인공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밥은 먹었냐’며 매끼 고기를 구워 먹이는 ‘엄마’는 아무나 못하는 일이다.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 나도 그리 생각한다. 엄마는 바로 이런 삶을 산다.
엄마가 된 내가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지금껏 살면서 맡은 역할 중에서 이토록 이타적인 역할도 없다. 누군가 와 밥 한끼 먹는 시간도 아깝다고 생각할 정도로 시간 관리가 철저한 이기적인 내가 3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아이에게 줄뿐 아니라 아이를 위해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지불하는 엄청난 희생들을 감내했다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엄청난 도약임에 틀림없다.
자신감은 결국 내 안에서 나온다. 외부의 인정을 바라기 이전에 스스로 면류관을 씌워주자. 엄마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를 탓하지도 말자. 그 사이 봄 꽃보다 더 예쁜 아이는 훌쩍 자랄 테니까. 봄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흩날리면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내 아이도 세월이 흐를수록 그렇게 내 품을 서서히 떠나 자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아이 곁에서 꽃구경 실컷 하는 특권을 누리자. 엄마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만 잔뜩 지워주고 대접은 해주지 않는 사회가 원망스럽지만 뭐 어쩌겠나. 생명을 키워내는 엄마로 살면서 내 인생 최고의 면류관인 이타적인 인간으로 오늘도 성장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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