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숙연해진다.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끝났다. 마흔이 될 때까지 ‘그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소’라는 욕망을 어찌 참고 평범한 직장과 가정 생활을 17년이나 지속한 것인지 놀랍다. p124 "인생은 사랑과 예술, 양쪽을 다 누릴 만큼 길지 않으니까." 그에겐 예술과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들이 평하기에 그럴싸해 보이는 안정된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가진 것도 없이 미래를 걱정할 틈 없이 아무 계획도 없이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6펜스)을 뛰쳐나간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안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다. 어느 날 불현듯 솟아 오른 욕망에 따라 주저 없이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떠난다. 내면의 목소리를 충직하게 좇았을 뿐이다. 하루 벌어 겨우 하루를 못 살더라도 ‘그리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그림'만 그린다면 다른 요건들은 필요 없거나 상쇄하고도 남는다.
스트릭랜드는 마흔 해까지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함께 살던 부인은 그가 예술에 관심이 있을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때로는 폭군처럼 보이는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글을 쓴 화자는 파리의 허름한 여관을 찾아가 걱정하며 묻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삼류화가로 그치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을 후회하지 않겠냐고?” “나는 그리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런 내 마음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스트릭랜드는 답한다. '어쩌지 못한 마음'이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만든다. 밥벌이의 고단함과 가장의 의무를 벗어버리고 '인간' 스트릭랜드로만 살아간다. 그가 겪는 생활고와 육체적 고통까지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만 가능하다면 모두 감당하고 말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보인다.
작가의 시선으로도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범한 예술가의 캐릭터에 호기심을 갖는 ‘나’의 시선을 따라가면 스트릭랜드의 다양한 면모를 만난다. 화자인 ‘나’도 처음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에서 ‘아하, 인간은 예측 불가능한 그럴 수도 있겠구나’ 로 점차적으로 변화 성장한다. 내가 20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읽으며 매번 다른 느낌, 낯선 감정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평범하지 않은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p243 “스트릭랜드는 분명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유별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는 화자의 생각에 이제서야 상당히 많은 부분 공감하게 되었다. 그를 쉽게 좋아하기도 어렵지만 호감을 갖지 않기는 더 어려운 마력(魔力)의 인물이다.
스트릭랜드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타히티 섬, 파레오만 걸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그림에 심취한 그를 그려본다. 옆에는 자신의 필요만 묵묵히 채워주는 한 여인, 아타가 있다. 자연인 스트릭랜드는 가족이 주는 행복감은 맛보고 의무는 행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남자다. 아타는 그저 곁에 있어주고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며 예술가의 삶을 살아 행복감을 느끼는 남편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하는 여인이다. 남편이라는 이유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는 틀로 가두지 않고 그저 그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내다. 대신 천재 화가의 그림을 마음껏 훔쳐 보는 호사는 누리겠다. 죽는 순간까지 영혼을 아낌없이 불태우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망고 나무 밑에 아이를 묻으면서도 나병에 걸린 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아타의 ‘초인적인 사랑’이 현실에 존재할지 의문이다.
스트릭랜드만큼 광기 어린 욕망, 주체할 수 없는 정열이 부럽긴 하다. 미친듯이 몰두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테니까. 신들린 듯한 욕망이 언제 출현할지 모른다는 것이 주변인에겐 활화산처럼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겠다.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꿈을 찾아 떠났는데 마지막엔 타히티 섬에서 비현실적인 가족을 꾸린다. 세상과 고립된 섬이라는 환경적 변화와 그저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아타가 그전의 가족과는 다르다. 남편에 집착하고 아이들에게 집착하던 그 전의 여인들과는 사뭇 다르다. 스트릭랜드가 집착하는 것은 세상에 오직 하나뿐이다. 그 하나, 평생을 추구해도 도달하기 어려울 듯한 ‘달’을 위해 아무것도 재지 않고 달린다. 그의 열정이 집념이 무섭긴 하다. 20년 전에 만난 스트릭랜드는 세상엔 이토록 무지 막지한 캐릭터도 있구나. 10년 전엔 그의 자유로운 영혼 본능을 따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지금은 또 다르다. 여전히 스트릭랜드라는 인간은 낯설다. 그의 독한 정열에 책을 읽는 내내 두려움을 느꼈다.
폴 고갱의 생애를 토대로 이야기를 썼다지만 결국은 작가 서머싯 모옴의 예술성과 맞닿은 듯 보인다. 화자인 작가 ‘나’와 화가 ‘스트릭랜드’가 만난 것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서든 통할 테니까. ‘미치지 않으면 결코 닿기 어려운 예술가의 삶’을 달과 6펜스를 읽으며 맛본다. 책 어디에도 달과 6펜스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하다. 결과물에도 집착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엔 태워버린다. 혼신의 힘을 다해 죽음을 향해 가는 순간까지 영혼이 쏟아내고자 하는 바를 다 쏟아내서 원한이 없겠다. 스트릭랜드처럼 비범한 캐릭터는 현실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울 듯하다. 다만 그처럼 나만의 ‘달’을 찾아 조금씩 정진하는 삶을 살고 싶다. ‘6펜스’는 덤으로 얻으면 좋고.
p123“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다만 영원한 현재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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