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죽음은 이반 일리치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사건일 뿐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24쪽)”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아니라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한다. ‘어쩌겠어, 죽었는데.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 있잖아’(17쪽) 추도식에 온 친구의 고백이 인간의 심연을 꿰뚫은 듯 정확해서 허를 찔린 기분이다. 죽음을 사유한다고 하지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라 타인의 죽음은 매번 간접적이고 겨우 내 삶을 돌아볼 뿐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걸까. 죽을 때 후회가 덜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반 일리치는 자만심을 채우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의 결혼을 하고, 유쾌하고 품격 있는 삶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일로 도피하면서 크게 희생하지 않으며 산다.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한 품격을 지키는 삶이었지만 실상은 아닌가 보다. "물론 그들(가족)은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이 이미 그들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55쪽)" 5000루블의 봉급으로 일에선 자존심을 채우고 사교계에선 허영심을 채우며 겉으로 보기엔 순조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듯 했지만 가장의 육체적 질병은 가정의 품위 있는 생활이 위협받고 일순간에 불편한 존재로 전락한다.
작년 이맘때 아빠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허리를 삐끗하셨는데 척추에 큰 무리가 되었고 골다공증으로 수술도 어렵고 난감한 상황에서 담낭이 터지면서 심각해졌다. 병원에 계신 아빠를 만나고 온 한 언니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며 연락이 왔다. 그 순간에도 난 여름에 끊어둔 한국행 티켓이 변경할 일이 없기를 바랬다. 아빠가 돌아가실 것 같은 상황에서 다섯 딸이 보인 모습은 제 각각이다.
아빠가 돌아가셔도 슬프지 않을 거라는 고백은 슬프다. 새엄마 앞에서 딸들을 지켜주지 못한 아빠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다. 아빠와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생각나는 게 없다. 우리가 한국에 갔을 때, 셋째 언니가 주선한 여행지로 여행을 떠났다. 아빠는 생전 처음 그렇게 좋은 곳으로 여행을 온 것이라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돌아가실 뻔한 아빠를 만났고 다시 독일로 오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데도 손 한번 잡아드리기가 그렇게 어려웠다.
고통 속에서 헤맬 때도 거짓말로 걱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불편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불편해서 미칠 것만 같은 그간 이어온 관계의 연장선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도. 유쾌하고 품위 있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적당한 기대를 하고 최소한의 의무를 수행한 일리치의 속마음 그대로 죽음의 순간에 아내와 자식들이 대하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산 대로 죽음 앞에선 그대로 돌려받는 것 같아서 씁쓸하다. 죽음 앞이라고 모든 게 용서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동안의 관계와 업적으로 그 사람의 죽음이 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내 삶은 어떤가? 내 주변의 중요한 관계가 그것을 증명해줄 테니까.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한다면 설명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것만은 절대 인정할 수 없어.(95쪽)' 이건 곧 자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일 테니까. 인정 하고 싶지 않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끔찍한 진실은 육체적 고통을 가중할 뿐 아니라 정서적인 괴로움을 더해 몸부림치게 했다. 죽음의 길목에서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희망을 갖는 부분은 안타깝다. '그건 꼭 통증 때문만이 아니라 혼자라는 끔찍한 외로움의 절절한 표현이었다(78쪽)' 아빠도 병원에서 죽음의 공포만큼이나 혼자라는 끔찍한 외로움에 괴로우셨을 것이다. 자식이 일곱이나 되지만 아무도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공감해주는 자식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셨을까. 아빠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곁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게라심처럼 돈을 주고 고용한 사람만이 아빠 곁을 지키며 용변을 받았다.
'어린애를 어루만지고 달래듯이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입을 맞추고 자기를 위해 울어주기를 그는 바랐다.(75쪽)' 오랜 고통에 허덕이지 않고 죽길 바란다. 최소한 가까운 가족만이라도 내가 아파하고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순간에 슬퍼하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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