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웰은 스스로를 하급상류층이라 칭하고 인도 제국 경찰 소속으로 5년간 복무한 후 계급적 우월감으로 하층민을 억압한 일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부랑자의 삶과 노동 계급의 삶을 자발적으로 경험하며 쓴 글이다.
"나는 형편이 가장 나은 편인 노동 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고 할 만큼 너무나 편안한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겨울날 저녁에 차를 마시고 난 뒤, 조리용 난로에선 불꽃이 춤을 추고, 난로 한쪽엔 아버지가 셔츠 차림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경마 결승전 소식을 읽고, 어머니는 다른 한쪽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1페니 주고 산 박하사탕 때문에 행복해하고, 개는 카펫에 드러누워 불을 쬐는 정경을 불 수 있는 집은 정말 가볼 만한 곳이다."(101쪽)
카펫에 드러누워 불을 쬐는 개만 없을 뿐이지 우리 집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흡사해서 놀랐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진 않지만 그런대로 행복한! 우린 한국에서도 중산층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동 계급도 아니다. 어쭙잖게 ‘배운’ 사람에 속해서 단순 노동을 하기도 뭣하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좀 더 안락한 근무 환경과 노동의 강도에 따른 임금의 차이는 존재한다. 부자든 빈자든 중산층이든 평민이든 하루 세끼 밥 앞에 모두 평등하다. 글을 쓰거나 상담을 하는 일이 집을 짓거나 쓰레기를 치우거나 버스를 운전하는 일보다 고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담보다는 이발 기술이라도 익혔더라면 아이 머리 자르는데 드는 비용 10유로를 아낄 텐데 아쉽다. 아니면 재봉틀 다룰 줄 알았어도 주인 할머니에게 찢어진 바지를 부탁하지 않아도 될 걸 후회했다.
고학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애 둘을 키우는 동안 똥 기저귀를 갈고 매일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수채통에 낀 음식물 찌꺼기를 건진다. 하기 싫은 변기 청소를 인상 찌푸리며 했고 화장실 타일 사이에 낀 묵은 때를 칫솔로 박박 문질러 닦는다. 물기 하나 없고 화장실 신발도 신지 않는 독일에선 매일 바닥에 떨어진 물기를 닦고 머리칼을 떼거나 샤워부스 하수구에 낀 머리칼을 주워 버린다. 힘든 육아기엔 집안일을 도와주시는 아주머님께 하루 일을 부탁한 적도 있다. 집안의 묵은 때뿐 아니라 반찬까지 몇 가지 해주시면 감사가 절로 나왔다. 오만 원으로 깨끗하고 편안한 공간이 만들어질 뿐 아니라 내가 쓸 시간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돈만 많으면 일주일에 두 세번은 아주머님께 부탁하고 싶을만큼. 하인과 기사를 부리는 특권층의 삶을 한때는 철없이 부러워하곤 했으니까. 이젠 그런 삶은 꿈 꿀 수 없는 곳에 살지만.
일흔이 가까이 되신 주인 할아버지 피터는 집 짓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사는 집도 피터가 지었다. 지붕에서 비가 새든 벽면의 페인트칠을 하든 할아버지는 척척이다. 변기 뚜껑이 고장 난 작년엔 할아버지께서 작업복을 입고 오셔서는 화장실에 바로 드러누워서 변기 밑을 만지시더니 뚝딱 고쳐주셨다. 무슨 일을 하시든 그곳이 화장실이든 지붕 위든 온 몸을 던져 일하는 모습에 반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아우라도 풍겼다. 휴일엔 말끔하게 차려입고 제일 좋은 신을 신고 할머니와 춤을 추러 가시거나 외식을 가실 땐 육체 노동자의 행복한 미소까지 느껴져 부러웠다.
“노동 계급의 가정에서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 나는 일거리가 꾸준하고 벌이가 괜찮다면 육체노동자가 ‘배운’ 사람보다는 행복할 가능성이 많다고 감히 말하겠다.” (100쪽)
방학인 남편이 할아버지께 일을 부탁했다. 그날이 왔다. 남편에게 하루 일을 주셨다. 우린 이제 무슨 일이든 가릴 처지가 아니라 감사했다. 아침 일찍 할아버지를 따라서 간 남편은 중간에 보낸 문자엔 이리 써 있었다. 강을 건너 어느 허름한 농가에 왔고 문자 보낼 틈 없고 일은 장난 아니니 어떠냐고 묻지 말아달라고. 느낌상 무척이나 고된 모양이다 싶었다. 저녁 먹을 즈음 도착한 남편에게 현관문을 열어주며 얼굴은 살펴보니 생각보다 멀쩡해서 다행이다 싶었다. 노심초사한 내 손엔 하루 일당으로 번 돈을 쥐여주었다. 직접 몸으로 일해서 번 돈이라 눈물겹고 감동이라 쓰기 어렵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남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육체 노동을 해서 돈을 번 역사적인 날이라 그런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보였다. 8시간 일하면서 겨우 5분 쉬었고 밀폐된 공간에서 먼지를 뒤집어썼으며 팔 여기저기엔 글킨 자국도 남았다. 할아버지의 지휘 아래 노동을 했는데 죽는 줄 알았단다. 한국이었다면 체면 생각해서 하기 어려운, 그래서 못해본 일을 독일에 와서야 아무렇지 않게 했다니! 체면은 개에게나 줘버리라지.
독일에서 대학원에 다니는 남편은 졸업까지 한 학기가 남았다. 이젠 적극적으로 취업을 알아볼 때다. 여기저기 이력서도 넣고 본격적으로 일자리 구하기에 돌입했다. 오늘 밤 기차를 타고 장장 7 시간은 가서 내일 아침 9시에 인터뷰를 본다. 어디든 가리지 말고 취업이 급선무라면서 밤 기차도 마다하지 않고 떠났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락과 고독뿐 아니라(노동 계급의 집에선 고독하기도 어렵다)마음의 평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70쪽) 남편이 취업이 된다면 내겐 마음의 평화가 주어질테지. 당장 부활절 즈음에 쏟아질 계란 포장은 하지 않아도 되고. 그때까진 나에겐 커피 한잔, 남편에겐 맥주 한 병이 일시적인 흥분제로 불안을 잊게 해주는 고통 완화제다. 영국인에게 아편과도 같은 차처럼! 가문의 위신이라는 맷돌을 목에 걸고 다니지는 않고 성공해야 한다고 밤낮으로 들볶는 친척이 없는 것은 천만 다행이고. (2018년 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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