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한 날들이다. 이유가 뭘까. 욕심이나 조급함 같은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은 일이 있거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거절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노동이든 가리지 않고 할 마음의 준비는 갖췄다. 휴가 가기 전에 인터뷰 본 곳에서 8월부터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결국은 연락이 없다. 요양원에서 아침식사를 침실에 배달하고 치우는 일인데 그 일을 시도해보기로 결심하기까지 마음의 준비가 꽤 들었다. 나름 용기를 내서 6월 중순에 독일어로 인터뷰를 무사히 봤고 일을 하게 되면 8월부터라 더니 아직까지 연락이 없다. 성사되지 않을 모양이다. 그렇다고 지난번만큼 상심스러운 것도 아니다. 한편으론 하지 않게 되어 다행인 면도 있다. 지금 하던 대로 글 쓰고 공부하는 패턴을 유지할 수 있어서 안도한다. 엄마들과의 하반기 수업은 이미 시작했다. 그리스 고전 읽기다. 아, 그거였구나. 공부하고 글 쓰는 일상이라서 내 마음이 평화롭구나. 그뿐 아니라 독일어 공부를 쉬고 있어서 더 그렇다. 당분간일 테지만 지금의 이 평화를 누리고 싶다.
더 신기한 건 방학인데도 오누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크지 않다는 게 작년 여름과 다른 점이다. 그만큼 아이들이 컸다는 반증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작은 아이는 엄마랑 놀아달라고 자주 조른다. 하루에 한 번은 정원에 나가 논다. 카드 게임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어제 점심은 피자를 구워서 정원에 나가 먹었다. 뒷마당 바람이 살랑살랑 꽤 시원하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 마음이 절로 평화롭다. 겹겹이 촘촘하던 흰 장미는 한 장씩 휘날리며 떨어지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다. 분홍 장미는 아직도 봉오리가 많이 남았다. 그렇게 매혹적인 꽃도 흩어지면 아름다움이 가신다. 화단에 떨군 잎을 치우며 한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다음 주엔 피터가 나와 얘들을 위해 정원에 그네도 달아준단다. 마리타가 없는 정원을 우리끼리 누리려니 왠지 미안하고 허전하다. 작년 여름 저녁엔 마리타랑 정원에서 카드 게임도 하고 맥주도 마셨는데 마리타가 가꾸던 정원과 마리타는 세트다. 게다가 피터가 사시사철 푸른 마리타 나무도 정원 중앙에 심었으니 우린 매일 마리타를 만나는 셈이다. 기온이 30도가 넘게 오르는 날엔 아침저녁으로 피터가 잔디에 물을 듬뿍 주니 시원하다. 흠뻑 물을 머금은 잔디와 식물이 우리의 공간을 엄청 시원하게 만든다. 정원을 잘 가꿔야 하는 이유다. 아이들 웃음 뒤로 보이는 흘러가는 구름이 눈에 자주 들어오는 평화로운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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