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12권까지 읽고 든 생각들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고향에 돌아가려고 애쓰는 오뒷세우스를 보면서 그는 왜 그렇게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했던 걸까. 강대진 교수의 강의에서 귀향의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나는 내가 아는 나고 다른 하나는 타인이 아는 나. 우리의 기억은 나만 기억하는 것 외에도 주변인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 존재한다. 그 두 개의 퍼즐이 잘 들어맞을 때 온전한 내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엄마가 병원에 누워있을 때 누군가에게 안겨 집에 돌아가면서 "엄마, 빨리 나아서 집에 와" 같은 말을 두 돌도 훨씬 전에 말했다는 거.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말은 똑 부러지게 했다는 일화 같은 것들. 나에 대한 엄마에 대한 어떤 조각이라도 좋으니까 듣고 싶어서 외갓집 식구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오뒷세우스가 아름다운 요정 칼립소의 동굴에 1년간 머물 때는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 유혹에 끌릴 만도 할 텐데 어떤 심정일까 싶어서. 유혹에 현혹되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을 잊지 않는 오뒷세우스. 칼립소는 자신이 오뒷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보다 더 예쁠 뿐 아니라 자신과 산다면 영원히 죽지 않게 영생까지 준다는데도 그 청을 단박에 거절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낙원 같은 그곳을 뿌리치고 그저 어떻게 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지 고심한다. 칼립소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뗏목을 만들고 조언을 새겨듣고 다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오딧세우스는 한껏 들뜬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부모가 계시고 자식과 처가 있는 그곳이 바로 오뒷세우스가 돌아가 편히 쉴 집이다. 그 많은 고난의 여정을 감당하면서도 끝까지 닿아야 할 그 무엇.
봄에 마리타의 죽음을 보면서 나는 어디에 묻혀야 하나. 고민됐다. 남편에게 물었더니만 죽은 다음엔 무슨 소용이 있냐면서 지금 잘 사는 게 중요하단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어디에 묻힐 거냐고 끈질기게 물으니까. 자식들이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면 된단다. 그게 꼭 한국이든 독일이든 중요하지 않다고. 난 그래도 나이 들어선 고향에 돌아가서 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독일도 괜찮을 것 같다. 어디에 묻힐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을까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 같아서.
며칠 전 큰언니가 엄마 산소에 갔다고 단톡 방에 올렸다. 봄, 가을엔 둘째 언니가 형부랑 가서 벌초를 하고 가끔 큰언니도 간다. 언니들은 아들이 없어서 산소를 돌보지 못한다는 소리보단 딸이라도 부족함 없다는 걸 보여주듯이 더 애쓰는 것 같다. 그 시절 여자는 결혼을 하면 시댁에 뼈를 묻어야 했는지 엄마는 사십 년 가까이 웅천 할머니 댁에 외롭게 혼자다. 엄마가 살아계셨을 적에 좋아했던 백합만 그 곁을 뿌리로든 꽃으로든 사시사철 지킨다. 엄마는 엄마라는 숭고한 이미지로 언제 어디서든 불쑥 떠올라 같이 살아가지만 엄마의 묘지가 있는 곳에 가보는 일은 또 다른 의식이다. 만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더 많이 깊이 생각하게 될 테니. 엄마의 무덤이 그곳에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난 어쩌면 이곳 타지에서 반쪽자리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여전히 긴 여행 중인 걸까. 이방인의 삶은 경계선에 서서 중간에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최대한 누리고 어려움은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거 같다. 어디에 살든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듯이. 고향을 잊는다는 라토스를 먹은 건지 적응에 뛰어난 인간의 속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만하면 괜찮다고 자위하면서. 나를 기억하는 대다수의 타인이 부재한 이곳에서 어떻게든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아니면 낯선 곳에서 만난 새로운 타인의 비중을 힘겹게 늘려가면서. 어떻게든 다시 고향에서 살던 그대로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일지도. 당신의 고향은 어디냐고 묻는 내게 남편은 "당신이 있는 곳이 바로 내 고향이지"라고 말한다. 내 고향도 그가 있는 곳이라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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