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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오르는말들

메데이아, 이보다 더 통쾌할 수 없다.

시어머님이 밥 풀 때 내 밥이 아들한테 밀려서 욱했는데 통화하는 순서를 보니 남편아들딸 그리고 나밥 푸는 순서다. 통화는 하지 않아도 되는데 딸이 바꿔주는 바람에 얼떨결에 받았다. 영혼이 전혀 없는 형식적인 통화, 얘들 보느라 욕본다는. 통화할 때마다 바뀌지 않는 레퍼토리. 이젠 지겹다. 괜히 받았다 싶은 전화를 끊고 시댁과 마지막 통화가 언제인지 뒤져보니 대략 두 달 전쯤이다. 추석 때도 통화를 안 했다. 아니 못한 게 맞으려나. 통화를 안 해도 아무 지장 없이 사는데 괜히 착한 여자 코스프레가 발동돼서 남편한테 시댁에 전화 좀 하라고 챙긴다. 고향은 거의 잊고 사는 듯한 남자에게.

 

인터넷을 전혀 못하시니 보이스톡이나 페이스톡을 못한다. 남자는 해외에서 무료로 전화가 가능한 왓츠 콜 앱을 받아서 열심히 포인트를 모아둔다. 지난번에 겨우 4분 통화하고 끊겨서 마음이 쓰인다면서. 이렇듯 시댁과는 우리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연결되기 어렵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댁에서 우리와 연결은 불가능. 아마도 그게 제일 힘들 거다. 아무 때나 목소리 듣고 싶을 때 전화라도 할 수 있는 것과 언제 올 지 모르는 전화를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시간 많은 노인 둘이 안쓰럽다.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안쓰러움은 싹 사라지지만. 과거에 내가 당했던 일만 떠오른다. 심통이 고스란히 남편에게 간다. 그렇게 애틋하던 남편이 왜 그렇게 꼴도 보기 싫은지. 그동안 너무 잘해줬구나 싶은 게 괜한 짓 했다 후회한다. 보지 않고 목소리조차 안 듣고 살 적엔 세상 평화롭다.

 

하필이면 비극 중 '메데이아'에 꽂힌 날 타이밍도 죽인다. 메데이아의 격분이, 잔인함이 이상하리만치 공감이 잘돼서. 메데이아는 왕족의 여인을 택하고 자신의 아이를 낳아준 아내를 배신한 남편에게 '가장 따끔한 맛'을 보게 하려고 '가장 불행한 여인'을 자처한다. 오죽하면 자식을 죽이겠나. 왜 그렇게 그녀에게 끌리는지 찬찬히 들여다보니 나도 메데이아와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시동생의 하극상에 시어머니의 경우 없음. 시아버지의 침묵. 효자 남편의 모습에 진저리 쳤던 일. 그 일은 잊을 수도 없고 잊히지가 않는다. 그뿐만은 아니다.

 

'이 사람과 살아 말아' 앞으로 이 남자와 살아야 한다면 그래서 사는 동안 이 남자의 가족을 만나야 한다면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 큰아이가 두 돌도 되기 전에 생각했다. 일단 그들이 끔찍하게 생각하는 아들이 이혼을 해도 엄청난 타격일 거다. 타인의 시선은 또 얼마나 의식하는지. 그런 이에게 큰아들의 이혼만으로도 한 방 먹이는 거다. 그러다 이혼 정도는 너무 약하고 복수 해야겠다고. 복수 시나리오는 이렇게 짰다그녀가 가장 아끼는 아들이 불행해진다면 그들이 불행해질 테니까그와 나 사이에 난 아이를 데리고 해외도주를 해서 영영 못 찾게 하던가 아예 같이 죽어버릴까메데이아처럼 격분했다.

 

왜 애들의 불행으로 애들의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려다가 나 자신이 그 두 배의 고통을 당해야 하지?” 메데이아처럼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렬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다 주는 법’이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원한이 얼마나 컸으면 메데이아는 몹시 분한 마음이 멈춰지지 않았을까. 결국은 자신을 파멸에 이르고 마는. 차마 실행하지 못했지만 상상했던 일이 비극에서 그대로 재현한다. 통쾌해 죽겠다. 이런 게 바로 카타르시스인가 보다. 내 감정을 어쩜 이렇게 통쾌하게 해소하는지. 내가 파멸되더라도 저들을 지옥에 빠뜨릴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하고 싶었다. 그랬던 내가 현재 2년 넘게 얼굴 한 번 볼 수 없는 구만리 떨어진 곳에 산다. 역시 신은 내 편이다. 

 

특히 여성 심리 묘사에 탁월한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라는 옮긴이 천병희의 문장에 격하게 공감한다. 이보다 더 내 마음을 꿰뚫을 수 없다. '격렬한 분노가 구제할 길 없는 악'이라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만 차선책으로 상담을 받았다. 남편이 탯줄을 끊는 것만으로도 나의 분함과 억울한 마음은 잠잠해졌다. 남편에게 정확하게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 부모님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진다. 앞으론 하지 않겠다. 두 달에 한 번 주기도 짧다. 이런 마음을 자주 망각하고 도덕적 자아가 발동되어 실수로 전화를 받는데 그마저 하고 싶지 않노라고. 당신 부모님 챙기는 건 당신이 하라고. 난 당신에게만 잘하기도 벅차다. 메데이아로 대리 충족했으니 남편을 더 이상 괴롭히는 일은 줄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