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은 나의 독일어 개인 선생. 일흔이 넘으신 프랑스인으로 독일인과 결혼해서 독일에 사신지 40년이 넘으셨다. 나처럼 외국인이면서 독일어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무료로 독일어를 가르쳐주신다. 일주일에 하루 쇼팽의 집으로 가서 수업을 듣는데 2019년 12월 성탄절 휴일이 시작되기 전 쇼팽과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특별한 날인만큼 내가 아침을 대접했다. 밥집이 아니라 빵집에서. 공간이 바뀌니 속에 있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하게 된다. 가장 인상에 남는 질문은 이거다. 남편이 새롭게 들어간 직장에서 잘 적응하는지 물으시더니만, 만약에 독일에 오기 전인 3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독일에 오겠느냐는 심오하면서도 멈칫하게 만드는 질문. 오랫동안 머릿속에 떠다니던 질문이다.
독일이 좋은 점을 많이 장착한 나라지만 내 입장에선 완벽하(기대치를 낮추는 게 필요) 게 만족스러운 곳은 아니기에. 내가 체감하는 좋은 점은 자연 친화적인 환경. 공기에 민감한 나는 맑은 공기를 매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 나라가 국민을 지켜준다는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안전에 대한 불안한 요소가 한국에서 살 때보다 줄었다. 대학까지 교육비가 무료라는 것도 다행스럽고. 의료비도 마찬가지고. 한국에선 사비로 저축을 해서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면 독일은 높은 세금으로 대비한다.
나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해서 일단은 그저 그렇다고 대답했다. 좋은 점 반 그저 그런 점 반으로. 오누이가 즐겁게 학교에 다니고 남편은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한다. 나 말고 다른 가족 구성원 만족도는 최상(이라고 여기는 건 내 생각이고 다들 각자의 고충이 있다). 나는 역시 이방인으로 오랫동안 독일에 산 쇼팽에게 되물었다. 쇼팽은 어떨 거 같은지. 자신은 시간을 되돌린다면 프랑스에서 살았을 것 같단다. 고향에서라면 자신에게 훨씬 직업적인 면에서 유리했을 거라면서. 독일인 아내를 어디서 만났느냐니까 프랑스에서 만났단다. 아내는 내 아들이 다니는 학교 독일어 선생이었는데 지금은 은퇴하셨다. 나는 어떤 답변을 하게 될까. 더 오래 살아본 이후에야 할 수 있을 대답.
지난주 독일어 수업을 하면서 아주 적절한 지문을 만났다. 내가 현재 독일 삶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발견했다. 사랑(Liebe)-우정(Freundschaft)-가족(Familie)-직업(Beruf) 이 중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하고 그 이유를 말하는 거였다. 순위 정하기 쉽지 않은 중요한 항목들. 나는 만약 내게 가족이 없다면 (현재 결혼해서 완성한) 직업이 중요하다고 선택했다. 이유를 독일어로 설명하느라 애먹었지만. 직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떤 한 사람이 선택한 직업은 그 사람을 대변하기 때문이라고. 물론 어쩔 수 없이 밥벌이로 하게 되는 일도 있겠지만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일은 행운이라고 여긴다. 오랜 시간 그 일을 하면서 산다는 건 바로 그 사람을 형성하게 될 테니까.
쇼팽은 다시 물었다. 만약 돈이 많아서 일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래도 나는 일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게 꼭 수입과 직결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일이 바로 자신의 존재감과 자긍심을 느끼게 해 줄 테니까. 나한테 그런 일은 엄마들과 함께 읽고 쓰는 수업이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더 확장해서 적극적으로 했을 신나는 일. 독일에선 하고 싶은 만큼 열정적으로 못 하는 게 가장 안타깝다. 직업적 성취감이 꽤 중요한 기질의 사람인데 마음껏 원하는 일을 못하는 게 독일 사는 삶의 만족도가 낮은 이유다.
인생의 여러 선택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늘 아쉬움이 남는다. 결혼을 선택한 이상 싱글의 자유로움은 늘 선망의 대상이다. 아이를 간절히 원해서 낳고도 후회되는 순간이 있다. 경력 단절을 감수하고 육아에 올인한 것도 마찬가지. 독일에서 살기를 강력히 원하는 남편의 의지에 따라 삶의 터전을 옮겨 사는 지금의 선택도 언젠가는 아쉬움이 생기겠지. 내가 한 선택들도 잘 들여다보면 잘했다 싶은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면이 있다. 어떤 선택이든 그렇지 않을까. 백 퍼센트 완벽하게 만족하는 건 없을 테니까. 그저 그 순간 깊이 고민해서 최선이라 믿고 선택하고 선택한 이상 아쉬움이 덜 남도록 만드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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