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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꽃유진/life in Schwanewede

편지를 쓴다는 건

"편지는 뇌를 일시 정지 상태로 이끕니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함께 생각해볼 수 있지요."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가 한 인간에게 보여준 더없는 친절이었습니다."

"편지와 메모 모두 칼비노가 강조했던 ‘가벼움’을 더한 장르입니다." 

"편지는 아무리 다급한 내용을 담고 있어도 표현하기 힘든 가벼움과 연결성이 내포되어, 쓴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대화를 위한 기초가 되어줍니다." <다시, 책으로> 첫 번째 편지 중에서.

 

 

편지 형식으로 쓴 매리언 울프의 글을 읽어서만은 아니다. 편지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드물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고 가끔 꺼내 읽으며 기억하며 그리움을 달래는 것도 그 사람의 필체가 전해주는 진심이다. 독일에서 첫 번째 고향인 슈바니비데를 떠나기 전, 가장 중요한 사람 둘에게 마음을 전했다. 예쁜 카드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모국어가 아닌 독일어로 편지를 쓴다는 건 보통 정성으론 힘들다. 번역을 거치면 원래 전하려던 마음이 바뀌지만 그래도 할 수 없다. 읽는 이의 모습을 보니 알겠다. 원문 그대로를 전하지 못하더라도 내 마음은 어떻게든 전달된다는 것을. 말로 전하지 못했던 것을.  

 

외국살이가 외롭지 않게 도운 제일 큰 도움을 준 사람은 클라우디아. 시작은 남편 학교의 호스트 패밀리였지만 그 이후 관계를 꾸준히 이어간 건 우리 둘이다. 뭐가 가장 고마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매주 산책을 하면서 그 시간에 애정을 갖고 질문을 던져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 일이다. 좋은 질문은 때론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때마다 가족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갖고 쿡스하펜으로 바다를 보러 가는 등 기억에 남는 추억을 여럿 남겼다. 그녀에겐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삶을 즐기는 법을 배웠다. 긍정적인 기운은 덤이다. 나만 그녀에게 배운 줄 알았는데 그녀도 나에게 한국의 문화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배운 점이 많단다.

 

친밀함의 가장 높은 단계는 상대방의 필요를 적절하게 채워줄 주 아는 거라는데, 그 친구가 그랬다. 무엇보다 그녀의 바람대로 독일어로만 대화하기 미션을 올해부터 실행했다는 거. 그런 나를 적극적으로 도운 일인이다. 송별회 겸 그릴 파티 때는 한국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면서 나의 독일어 향상을 기뻐했다. 처음엔 그토록 독일어를 거부하던 모습뿐 아니라 마음이 준비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이후 180도 바뀌어 열심히 하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이사 가서도 산책 친구를 꼭 만들라는 당부까지.

 

 

다음은 쇼팽이다. 일흔이 넘으신 분이 얼마나 유쾌하고 섬세하고 순수할 수 있는지. 독일어 선생이지만 그에게선 독일어만 배운 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을 겸손하게 베푸는 모습을 직접 경험하면서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배웠다. 나도 그처럼 내가 가진 재능을 아낌없이 타인을 위해 나누고 싶다는 다짐을 전했을 때 감동했다. 그 작은 실천으로 발마사지를 해드렸는데 소감으로 써주신 글귀는 감격이다. 머리만 쓰던 사람이 몸(손) 쓰는 일에 전념하는 모습에 몹시 놀랐다고.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부분을 정확하게 알아주어 기뻤다. 난 이제 머리와 몸을 동시에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고 그 시작이 바로 발마사지다.

 

이곳에서 쇼팽과 클라우디아를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인지 선한 사람을 만나면서 깨닫는다. 첫 고향이 되어준 시간을 마무리하며 마음을 담아 편지를 꾹꾹 눌러쓰고 인사를 하니 이제야 실감이 난다. 여기를 떠난다는 사실을. 가까이에 살아서 매주 쉽게 자주 만나던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건 슬픔이지만 200km의 물리적 거리는 별거 아닐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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