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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꽃유진/life in Schwanewede

도시락 높이만큼 쌓이는 자괴감

10분 후 알람 버튼을 두 번이나 누르고서야 겨우 찌뿌둥한 몸을 일으킨다.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손을 씻으면서 물이 차갑다고 느낄 틈도 없게 잽싸게 세수하고 부엌으로 간다. 밤새 내린 빗방울이 뿌옇게 맺힌 창문으로 아침이 조금씩 밝아온다. 썰렁한 공기에 얼른 조끼를 걸친다. 성냥으로 초에 불을 켠다. 포트에 물을 받으면서 보니 어젯밤 씻으려고 넣어 둔 세 개의 사과와 당근 두 개가 그대로 물에 잠겨있다. 과일 도시락을 싼다는 걸 깜박한 거다. 20분이나 늦게 일어났으니 서둘러야겠다.

 

포트에 물은 끓는데 커피 내릴 시간은 없겠다. 싱크대에 선 채로 사과를 반으로 자르고 사분의 일로 잘라 씨만 뺀다. 당근도 깎아 도시락에 차곡차곡 넣는다. 식구수대로 도시락을 싸야 하는 날이다. 빵까지 싸려면 개수는 배가 된다. 한식 도시락도 아닌 과일 자르고 빵에 버터 발라 치즈 넣는 도시락은 이젠 일도 아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손놀림이 가뿐하고 마음도 이만하면 괜찮은 날이다.

 


어젯밤에 씻어둔 쌀은 취사만 누르면 된다. 냄비에 다시마 한 조각을 넣고 물을 끓인다. 그 사이에 배추를 씻고 끓어 오르기 전에 된장을 두 스푼 넣어 배추 된장국을 끊인다. 남편이 일어나서 커피콩을 갈아 커피를 내린다. 전날 사둔 빵이 다음날까지 꽤 촉촉하고 먹으면 든든한 빵에 버터를 바르고 치즈를 얹어 한 입 베어 먹는다. 때 맞춰 내려 준 커피를 마시니 목은 메이지 않는다. 얘들을 깨우기 전에 빵 한 조각 먹을 시간은 되겠지만 덕분에 수업엔 조금 늦겠다. 그래도 커피 반 잔은 마시고 갈 생각에 마음은 느긋하다. 바쁜 와중에 여유 한 조각은 챙긴다.

 

그 찰나 오종우의 <예술 수업>에서 읽었던 타르콥스키의 영화 <희생>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어느 수도사가 죽은 나무를 심고 3년간 꾸준히 물을 주었더니 나무가 살아났다는 전설.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죽어가는 아빠가 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은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영화에 온 힘을 다해 담고 싶었을 거다. 자신이 세상에 없더라도 꿋꿋하게 살아가기 바라는 아들에게 주고 싶었던 희망과 확신을. 어쩐 일인지 깨우러 가기도 전에 딸이 눈 비비며 윗층에서 내려와 안긴다. 제법 묵직해진 궁둥이다. 돈이란 '돌아오는 가치의 크기'를 재는 거라지만 그래도 난 가치 있는 일들에만 너무 많은 시간을 주었다. 쉽게 떨쳐지지 않는 자괴감이 집을 나서는 나를 계속 따라온다. (2019년 3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