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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리고영화

땅처럼 수동적인 사람, 스토너

스토너는 어떤 사람인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땅처럼 수동적인 사람’ 스토너가 죽었다. 눈을 감는 순간 손에 들렸던 건 그가 쓴 '아이처럼 섬세하고 활기찬' 책이다. 기쁨을 주었던 그레이스도 사랑했던 캐서린도 아니다. 스토너가 늘 원했던 건 온기가 전해지는 인간미 넘치는 사랑의 손길은 아니었을까. 친밀함의 관계는 갈급했지만 채워지지 않았고 몰입해서 구축한 지식 세계가 마지막에도 만족을 느끼게 해 주고 그의 곁을 지킨다.

 

책임감, 그리고 절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어떤 순간에도 투쟁하진 않는다)

작가는 이토록 무정하고 무심한 캐릭터를 배우자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남편의 안쓰러움이 배가되도록 하는 효과인가. 덕분에 스토너의 인내심이 그녀와의 관계에서 가장 돋보인다. 신혼여행부터 실패를 예감한 결혼 생활,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하지만 투쟁의 방법은 늘 싸우는 것만은 아닐 게다. 때를 기다리거나 견디면서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다. 투쟁의 다른 모습이라고 짐작한다. 아니면 책임감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한 번 선택한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번복하지 않은 미련함인가.

 

아이가 태어나면 좀 나아질까 기대했지만 어떤 면에선 더 악화된 느낌. 딸을 돌보면서 성장하는 자식과의 유대감을 통해 행복감을 느끼기도 잠깐, 그 사소한 행복마저 아내인 이디스는 뺏는다. 남편을 위한 배려는 전혀 없이 자기 멋대로 모든 걸 결정하고 급기야는 스토너가 아끼는 공간까지 빼앗는다. 스토너는 언제나 그렇듯이 묵묵히 견디고, 어떤 절망이라도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애쓴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었다. 스토너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그의 어머니를 닮았다. “마치 생애 전체가 반드시 참아내야 하는 긴 한 순간에 불과”해 보이는.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 

어린 시절 집에서 느꼈어야 할 안정감을 대학에서 느낀 스토너는 문학에 매료되고 학교에 남아 교육자로서 기쁨을 맛본다. 그는 헌신적인 교육자다. 호기심 많은 학자의 열정은 무기력하고 고통스러울 때에 그를 지켜준다. 무례한 학생 워커의 등장으로 학과장인 로맥스와도 갈등. 형편없는 강의 일정을 주는 등 괴롭힘을 당할 때도 시간이 많이 생기니 자유롭게 책 읽을 시간이 많아졌다며 애써 자족한다.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교육자라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원칙에선 완고하다. 끝까지 괴롭히는 로맥스에게 참다 참다 “무식한 개자식”이라고 한 방을 날린 건 시원하다.

 

욕망과 공부

지식의 세계, 딸 그레이스, 그리고 캐서린에게 특별한 열정을 주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친밀감을 맛보지 못한 스토너에게 캐서린은 안식처(사랑)다. 기존 관념으론 불륜이지만 일탈과는 어울리지 않는 스토너에게 찾아온 귀한 사랑.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사랑을 나도 모르게 간절히 응원했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온전하게 받아들여준 사람을 한 번이라도 만난 것에 다행이라며 미소 지었다. 그 둘이 어떻게든 계속 이어갈 방법이 없을까 고심할 정도로. 스토너가 캐서린 드리스콜을 만날 때 가장 생기가 넘치고 행복해 보였기에.

 

농장 일을 돕던 어린 모습부터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스토너의 생애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고요함과 저릿함이 느껴진다.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은 가당찮다. 스토너 인생 길목에 놓인 바윗덩어리 같은 장애물은 훌쩍 뛰어넘을 수도 깨버릴 수도 없다. 그는 얼마가 걸리든 개의치 않고 천천히 그 장애물 앞에 멈추거나 서성이며 삭막한 풍광에서 풀꽃 하나도 귀하게 여긴다. 어떤 절망 앞에서도 한 줌의 기쁨을 찾아내려 애쓰는 게 짠했다가 참 대단하다 싶다. 무슨 일이 닥쳐도 인내하고 아파도 담담히 수용하는 모습이 나무도 아니고 땅이 맞다. 한 번 품은 것은 불평의 소리는 제거된 채 할 일을 무던하고 강인하게 해낸다. 스토너, 스토너스러움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보여준다. 농부의 아들답게 ‘고집스러운 땅’을 닮은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