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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곳보통날

의사의 친절함에 반하다 대문만 하게 새로 난 딸의 앞니 두 개 옆의 헌 이가 며칠 전부터 흔들린다. 심하게 흔들리는 건 아닌데 썩어서 양치질할 때마다 피가 나고 잇몸이 붓는다. 불편하니 어떻게든 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돼서 어제 치과에 다녀왔다. 방과 후 수업이 있는 화요일은 오후 네 시에 끝난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학교 앞에서 만나 바로 치과로 갔다. 관공서든 미용실이든 병원이든 약속(Termin)이 중요한 독일에서 무조건 간다고 진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응급 상황에선 예외가 있을 테니 일단 갔다. 이젠 요령이 생겨서 마지막 진료 때는 늘 4개월이나 길게는 6개월 후의 진료 약속을 잡아둔다. 확인해보니 다음 예약은 4월 24일이다. 그만큼 약속이 꽉 잡혀있다. 예약의 일상화다. 아이가 아파하고 피도 났다니 얼마나.. 더보기
마흔 두번째에서야 의미를 찾게 된 식탁에 봄이 왔다. 남편은 쇠고기 미역국을 끓이고 노란 튤립 꽃을 유리병에 꽂아 준비했다. 노란 잎이 하나 둘 떨어질 무렵에 길다란 초록잎 사이로 분홍 심지가 단단하게 자리잡은 새로운 화분이 왔다. 직접 만든 케이크에 하얀 초를 꽂아 밝히니 기분이 환해진다. 음력 생일과 호적상 생일의 혼돈으로 두 번의 생일을 치뤘다. 엄마가 글 쓸 때 먹는 초콜릿을 사고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린 정성스런 선물도 잔잔한 감동이다. 주민등록상 내 생일은 3월 1일이다. 다섯 번째 딸이라 실망한 것치고는 겨우 일주일 늦게 신고된 날짜다. 독일 온 첫 해에 주인 할머님은 가족 모두의 생일을 남편에게 물으셨다. 남편은 생일을 챙길 줄은 모르고 서류상 생일을 알려드렸다. 주인집 할아버지 피터와 할머니 마리타는 한 집에서 위아래층에.. 더보기
샷츠가 셔츠된 사연 한국 드라마 즐겨보는 독일 언니는 연인 사이에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왜 '오빠'라고 하는지 식당에서 점원을 부를 때, '언니'나 '이모'라고 부르는지 의아해했다. 영어 자막으로 오빠는 brother로 이모는 aunt로 뜰 테니 이상할 만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형제 사이나 가족끼리 부르는 호칭과 다른 의미라는 걸 설명하는 데 애 먹었다. 독일에선 존칭으로 여자에겐 Frau를 남자에겐 Herr를 성 앞에 붙인다. 친한 사이엔 나이 상관없이 이름을 부르고. 난 여전히 아이들에게 마리타 이야기를 할 때 마리타 할머니라고 부르게 된다. 물론 직접 부를 땐 마리타라고 부르지만. 한국 문화에선 선생님 이름을 대놓고 부를 일은 없다. 한국인과 일한 적 있는 외국 친구는 한국인이 높여 부를 때 ‘님’이 붙는다면서.. 더보기
주인 닮은 개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날, 기차 플랫폼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는 일행이 있었다. 보통은 연인이 주위 사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진하게 입 맞추는 장면을 부러운 듯 쳐다봤다면 이번엔 주인의 품에서 사랑 받는 개다. 의자에 앉은 주인이 그 큰 개를 다리 사이에 넣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털을 쓸어준다. 와, 사람에게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애정이 묻어났다. 개도 주인만큼이나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개 진짜 복 받았구나. 행복하겠다. 생각했는데 기차에 타고 보니 바로 우리 옆자리다.  기차에 지정석을 두려면 요금을 더 내면 된다. 우리도 마침 얘들이 있는데 좌석이 없으면 난감할 테니 지정석을 잡았다. 개를 데리고 탄 두 명의 그 중년 여자도 그런 모양이다. 우리처럼 마주.. 더보기
친구와 함께라서 덜 외로운! 독일에서 친구가 몇 명이야? 묻는다면 두 명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둘 다 나의 안부를 가장 걱정해준다. 타국에 살면서 덜 외롭다면 이들 덕분이다. 그중 한 명인 클라우디아는 남편이 학생일 때 호스트 패밀리로 만났지만 계속 관계가 유지된 것은 나로 인해서다. 거의 매주 산책도 꾸준히 하면서 시간과 애정을 쏟았다.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난 일은 독일에서도 행운이다. 연말엔 그녀의 집에서 함께 보냈다. 늘 그렇듯 우아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미리 예쁘게 차려진 테이블과 한쪽에서 타오르는 벽난로 정갈하게 내오는 음식들 반갑게 맞는 얼굴 속에서 오가는 대화는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했다. 우리가 다녀온 암스테르담과 그들 부부가 다녀온 베를린 여행 이야기뿐 아니라 한국 여자 친구를 둔 토비아스와 .. 더보기
김장 대신 크리스마스 과자 굽기 지난주엔 언니 두 명이 모여서 40킬로 김장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배로 부칠 수 있으면 김장을 보내주고 싶다고도 했죠. 뭘 넣어도 겨울 김장은 맛있다고 솜씨 좋은 언니는 말했어요. 기가 막히게 맛있다는 이야기겠죠. 김장이 끝나고 돼지고기를 삶아 보쌈을 해 먹었고요. 군침이 돌더라고요. 막 담근 김장김치 맛은 끝내줄 게 뻔하니까요. 한 통 얻어오면 부자가 된 것처럼 한동안은 반찬 걱정 없이 지낼 텐데요. 전 어제 오누이를 데리고 크리스마스 과자를 구웠어요. 마침 마트에 크리스마스 과자 세트가 즐비하게 나와 있기도 하고요. 며칠에 걸쳐 준비물을 준비했어요. 과자 찍는 틀도 사고 계란물 바를 붓도 테디(TEDI)에서 싸게 샀어요. 테디는 한국의 다이소 같은 곳인데 1유로 샾이라고 저렴한 제품이 많아요. .. 더보기
독일어 수업 실은 요즘 글을 못 쓰고 있어요. 핑계라면 독일어 수업에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하고 있어서죠. 왕복 3시간 걸려 수업에 다녀오고 수업에 4시간을 할애하는 게 쉽지 않군요. 배우는 건 좋아하는 편이고. 그게 어학이라면 뭐 나쁠 건 없지만 이 나이에 독일어를 배워서 무엇에 유용할까. 부정적인 생각은 접고 일단 갑니다. 어학원이 그렇듯 분위기는 학구적입니다. 물론 젊은 적 다니던 거라 에너지 소모 정도는 다르지만요. 4시간 독일어만 들리는 곳에 있다 나오면 어질어질합니다. 남매가 초반에 많이 힘들었겠구나. 빠른 시간 안에 잘 적응해 다니는 게 참 대단하다 싶어요. 제가 경험한만큼 이해의 폭이 늘어난다는 것도 확인하고요. 마흔에 철인 3종에 도전한 이영미가 쓴 에서 우리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 세 가지로 운.. 더보기
아빠, 취업할 자신은 있는 거죠? (학과, 경험과 능력 중시) 남편이 아직 학생일 때 큰아이의 친구가 집에 놀러 온 날이에요. 덩치는 작지만 섬세하고 배려심 깊은 아이라 우리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겸비한 멋진 아이라고 말하곤 했어요. 그 친구가 놀다가 갑자기 너희 아빠 직업은 구하셨니? 걱정스럽게 묻는 걸 부엌에서 들었어요. 우리 아이는 아직은 학생이셔, 라고 답했고요. 학교에서 그 친구뿐 아니라 아이 친구들은 정든 아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에요. 한국에 돌아가는지 계속 독일에 머무는지 물을 때에요. 그 무렵에 남매와도 이야기했어요. 독일에 올 때 아빠는 2년간 독일에 살아도 된다는 학생 비자를 받았지만 학교를 마치고 18개월안에 취업을 못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독일에서 계속 살고 싶은 아이는 아빠에게 재차 묻어요. 아빠, .. 더보기